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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hin Mustafayev, “Ethnolinguistic Processes in the Turkic Milieu of Anatolia and Azerbaijan (14th–15th Centuries),” Contemporary research in Turkologie and Eurasian studies: a festschrift in honor of professor Tasin Gemil on the occasion of 70th birthday, Stoica Lascu and Melek Fetisleam eds., Presa Universitară Clujeană, 2013, pp. 333 - 346의 번역임.
- 각주 생략. 발번역 주의.


아나톨리아 공국beylik시대는 튀르크 소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에 있어 중대한 종족정치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이러한 징후는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의 시기에 이미 징조가 보였다. 이 과정은 이 지역에 대한 몽골 지배의 쇠퇴 이후 일어난 정치-군사적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정치적 분열de-centralization을 촉진시켰다. 아나톨리아 공국들이란 튀르크 국가는 소아시아의 셀주크 국가와 일한국의 분열 위에 세워졌다.이 시기 가장 눈에 띄는 정치적 특징은 공국들이 서로 소아시아의 군사-정치적 지배권을 두고 격렬하게 경쟁했다는 점이다. 이 경쟁은 차츰 2개의 세력으로 정리되었다. ‘서부’라 할 세력은 오스만 국가이고, ‘동부’라 할 세력은 오스만 국가에 대항하는 여러 국가들의 집합으로, 카라만 베일릭, 카드 부르하넷딘 아흐메드의 국가, 아크코윤루 국가 등이 여기에 속한다. 베일릭의 시대, 양 세력의 충돌은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 튀르크 사회의 정치-군사적 진화뿐만 아니라 종족문화적 진화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였다. 일반적으로 민족적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 또는 그 분화를 14세기 말이나 15세기 초로 잡는 것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14 ~ 15세기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인들이 민족적으로 갈라진 것은 언어적 차이를 반영한 측면도 있다. 사실 이 시기는 다양한 튀르크 방언들이 통합되는 시기로, 이들 방언들은 어휘-문법적 표지lexical-grammatical sign들이 각자 구분되는 독립된 문어로 발달하였다.  푸아트 쾨프륄뤼Fuat Köprülü에 따르면 14세기는 튀르크어의 주요 문어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로, 이는 현재까지도 큰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쾨프륄뤼는 또한 이 시기 튀르크어가 퍼져나간 주요 지역들을 아나톨리아, 아제르바이잔, 화레즘, 금장 호르드, 투르케스탄, 마와라알나흐르로 정리했다. 또한 쾨프륄뤼에 따르면, “주요한 튀르크어의 문어 2종 ─차가타이어와 오스만어─ 과 별개로, 또 다른 튀르크 문어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아제르바이잔어Azerbaijani라 할 수 있으며, 횡으로는 호라산에서 아나톨리아까지, 축으로는 캅카스에서 바그다드까지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오스만어라 불리는 서부 오구즈 문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으로, 동부 오구즈 문어라 부를 수 있겠다.” 두 문어 사이의 지리적 경계는 14세기의 마지막 50년 동안 형성되었다. 무하렘 에르긴Muharrem Ergin에 따르면 언어적 균열은 삼순-시바스-이스켄데룬을 잇는 남북 축선으로, 이를 따라 소아시아는 실질적으로 2개로 분리된다. 이 축선의 서쪽은 서부 아나톨리아(오스만) 튀르크어가, 동쪽은 아제르바이잔어의 여러 방언들이 퍼져 있었다.

소아시아 서부에서 형성된 튀르크 문어는 매우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레메예프D. E. Yeremeyev에 따르면, 튀르크 언어학자와 방언학자들은 발칸을 통해 소아시아로 이주한 부족들이 소아시아 북서부의 튀르크인들의 민족집단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게다가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방언들은 소아시아의 중부나 동부 지역의 방언들과는 많은 표지들이 다르고, 오히려 가가우즈어에 가깝다. 북서부 방언들은 오구즈 언어의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긴 하나 페체네그어와 유사한 반면 아제르바이잔어나 투르크멘어는 킵차크어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레메예프는 역사언어학historical-linguistic 측면에서 진행한 연구라 한정짓긴 하였으나, 문헌언어학자philologists-linguists들 역시 이 의견이 적절하다 확인하였다. 토간Z. V. Togan 역시 아제르바이잔어(‘아제르바이잔방언’)이 일한조 시기 오구즈투르크멘, 킵착, 동투르케스탄 투르크어 화자들 사이의 화합작용으로 나타났다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4세기의 첫 50년 간, 일한국 궁정에서 튀르크어와 몽골어 사전을 편찬한 이븐 무한나Ibn Muhanna는 ‘투르크멘’어와 ‘투르케스탄 투르크어,’ ‘우리 나라의 투르크어Turki arzina’를 구분하고 있다.” 이 분야를 연구한 멜리오란스키P. M. Melioransky, 베키르 초반자데Bekir Çobanzade, 아흐메트 자페로을루Ahmet Caferoğlu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투르크멘’어가 아제르바이잔어를 가리킨다는데 동의한다.

아나톨리아 서부와 아제르바이잔에서 각각 형성된 두 튀르크문어의 차이는 각 지역에서 만들어진 문학 작품들의 어휘의미lexical-semantic 특성을 비교했을 때 적절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비교 분석은 이들 언어들이 사용된 지역을 개략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몇몇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기 셰이호을루Şeyhoğlu, 아식파샤Aşık–Pasha, 게르미얀의 셰이히Şeyhi, 아흐마드 다이Ahmed Dai, 아흐마디Ahmedi는 옛 아나톨리아어 즉 오스만어의 형성에 기여했고, 하사노을루Hasanoğlu(13세기)의 시, 무스타파 자리르Mustafa  Zarir, 유시프 맛다흐Yusif  Maddah, 술리 파키흐Suli  Faqih, 카드 부르하넷딘 아흐메드Qadı Burhaneddin Ahmed, 나시미Nasimi는 아제르바이잔 문어의 형성에 기여했다. 예컨데 푸아트 쾨프륄뤼는 무스타파 자리르의 시 “유시프와 줄레이하Yusif va Zuleikha”가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쓰여져 맘루크 술탄들에게 헌상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어 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터키의 학자 퀴르추오을루K. Kürkҫüoğlu가 나시미의 언어에 대해 평하기를, “하비비Habibi나 피줄리Fizuli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튀르크오구즈어에 가까운 아제르바이잔 방언을 사용했다.” 유명한 역사언어학자 무하렘 에르긴은 카드 부르하넷딘 아흐메드의 작품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쓰여졌지만, 언어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쾨프륄뤼는 또한 이 시들에 대해 “모두가 아제르바이잔 방언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드 부르하넷딘 아흐메드가 결코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한 적이 없고 평생을 아나톨리아 중부의 시바스와 카이세리에서 보냈다는 점, 무스타파 자리르는 에르제룸Erzerum 토박이였다는 점, 하사노을루는 호라산의 아스파라인Asfarain 출신이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꽤 흥미로운 점이다. 그럼에도 이 시인들은 아제르바이잔 튀르크어문학의 가장 초기 형태로 시를 썼다고 생각되며, 13 ~ 14세기 아제르바이잔 문어가 얼마나 광범위한 지역 ─동쪽으로는 호라산에서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중부까지─ 에서 사용되었는지 알려준다. 페트루셰브스키I. P. Petrushevskiy에 따르면 13 ~ 14세기 아제르바이잔문어는 단지 아제르바이잔 거주 튀르크인들만이 아니라 이란, 이라크, 아나톨리아 중부의 튀르크인들도 화자로 거느렸다. 에르긴이 적은 바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어의 사용권은 아나톨리아 동부, 캅카스 남부, 캅카스 아제르바이잔, 이란 아제르바이잔, 이라키와 시리아 투르크멘이 사는 키르쿠크를 포함한다.” 최근의 문헌학자들은 아나톨리아 동부가 13 ~ 14세기 아제르바이잔문어의 요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초기 비문이나 문학 작품들의 초기형이 이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탄생한 아제르바이잔 문학은 후일 폭풍과도 같이 발전했다. “술리 파키흐, 카드 무스타파 자리르는 에르제룸 출신, 유시프 맛다흐와 카드 부르하넷딘(중략)은 아나톨리아 동부 토박이였다.”

두 문어, 오스만어와 아제리어가 차츰 분화되는 과정은 현재에 와서야 알려진 것이 아니다. 당대 사람들도 이를 느끼고 남긴 기록이 몇몇 존재한다.  예를들어 중세 튀르크 문학자 알리셰르 나바이Alisher Navai는 나시미의 시를 평가하며, 이 하루피파 시인은 두 개의 언어, 룸어Rumi와 투르크멘어Türkmeni를 사용한다고 적었다. 룸어는 분명 당시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형성되고 있던 후일의 오스만어를 가리킨다. 투르크멘어는 아제르바이잔 문어를 뜻하며, 중세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민족집단 형성에 있어 투르크만(오구즈)인들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글에서, 나바이는 룸Rum(즉, 아나톨리아)의 다른 두 동료에 대해 기록했는데, 타브리즈 출신의 아제르바이잔인 미르 사예드 카슴 안바르Mir Sayeed Qasym Anvar와 모블라나 자니Movlana Jani에 대해 기록했는데, 나바이는 이전에 타브리즈에서 두 사람과 만났었고, 그 밑에서 수학한 적도 있었다. 타브리즈에서 안바르가 자니의 건강은 괜찮냐고 인사를 건네자, 자니는 룸어, 즉 아나톨리아 서부의 튀르크어로 답했다. 이 기록은 룸어와 타브리즈에서 쓰는 튀르크어, 즉 오스만어와 아제리어가 달랐고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당대인들도 알았음을 보여준다.

남겨진 중세 비문들은 통해 간제이T. Ganjei는 두 문어의 형성 과정과 어휘적 차이에 대해 분석했다. 간제이는 이븐 바즈자즈Ibn Bazzaz의 『셰이흐 사피앗딘 아르다빌리의 삶과 기적Safvat us–Safa』의 9장을 각각의 언어로 번역한 결과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 성인전의 오스만어 번역은 14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42년, 모함메드 알카팁 나샤티Mohammed al–Katib  Nashati는 사파비조 샤 타흐마스프의 뫼휘르다르möhürdar였던 줄카디를리 샤쿨리할리파Zulkadyrli  Shahquli–khalifa의 명령에 따라 시라즈에서 이 작품을 아제르바이잔어로 번역했다. 간제이는 두 역본을 비교하여 아제리어판이 튀르크어의 특성을 더 짙게 띄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간제이에 따르면, 냐샤티는 단어에 있어서 많은 수의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를 튀르크어로 옮겼고 페르시아어 원작의 시적 구절들도 튀르크어로 옮겼으나, 오스만어로 번역한 아무개는 이를 원래 그대로 남겼다. 나샤티의 번역과 아랍-페르시아어의 본래 어휘들의 일부를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다. alqış―dua  [blessing], bulaq―çeşmä  [spring],  buyruq―ämr  [order],  çaxır  içici―şärib–ül–xämr [wine drinker], dängiz―därya [sea], it―kälb [dog], özgä―qeyri [other], qarğa―zağ [crow], sayru―xästä [sick, ill], uşaq―väläd [child], yaqışur―münasib [suitable], 등. 동시에, 같은 단어에 대해 두 번역본이 다르게 번역한 부분을 비교해보는 것은 더 근원적인 결론을 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니샤티는 ‘없애다’를 아제리어로 apar라 옮겼으나, 오스만어 역본에서는 ilet라 옮겼다. 다른 예들은 아래와 같다. de―ayıt/eyit [말하다], dışaru―taşra [바깥], gänä―gärü [다시], öz―kändü [스스로], qalx―qop/turugäl [들다], qayıt―gerü dön [돌아가다], tanı―bil [알다], tap―bul [찾다], uşaq―oğlan [소년], yaxşı―eyü [좋은], yaman―yavuz [나쁜], yandur―yaq/göyned [태우다] 등. 간제이가 밝혔듯이, 사파비조의 번역에 쓰인 언어의 뿌리는 그 이전 아제르바이잔과 이라크에 존재한 잘라이르조에서 찾아져야 한다. 카라코윤루와 아크코윤루 국가에서 이 언어는 또 발전했다.  아제리어의 철자법은 다른 특성들과 마찬가지로 오스만어와 다르기에, 두 언어가 다른 존재임을 보여준다.

의심할 여지 없이 두 언어가 문어로 발전한 것이 서로 독립적이었기에, 서로의 차이는 더 커졌다. 마찬가지로 구어는 여러 지방 방언에 의지하고, 문어에 비해 지역적 특성이 더 크게 드러난다. 오스만어(룸어), 아제르바이잔어, 차가타이어는 당시 주요 튀르크 문어로, 서로 꾸준히 상호접촉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구어에 비해 더 보수적이었다. 중세의 여행자들은 분명히 튀르크어의 여러 구어 형태의 차이를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의 귀족 피에트로 델라 발레Pietro della Valle는 사파비조 압바스 1세 시대 이스파한의 궁정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이로,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샤 압바스 1세의 시대인 17세기 초반 사파비 국가는 급격한 ‘페르시아화’ 과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정과 군대에서는 아제르바이잔 튀르크어가 여전히 지배적 입장에 있었다.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샤와의 첫 만남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터키어,’ 즉 오스만 터키어로 말하여 압바스 1세는 몇몇 단어만을 이해했으며, 크게 놀랐었다. 더 놀라운 점은, 샤 압바스는 튀르크어를 전혀 못해 이 이탈리아에서 온 손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신하를 위해 페르시아어로 이를 번역해주었다. 델라 발레는 이스파한에서 긴 시간을 보낸 끝에 튀르크 방언을 익혀 사파비조 궁정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Grammatika della Lingua Turca라는 문법책을 집필하기까지 했다. 그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의 터키어’를 이란인들은 ‘오스만어’라 부르는데, ‘이란의 투르크인’들이 쓰는 말과는 달랐다. 따라서 델라 발레는 샤 압바스와 통역을 통해서 대화해야만 했다. 사파비조가 이미 하타이 Khatai(샤 이스마일 1세 사파비), 하비비Habibi, 피줄리Fizuli, 아마니Amani 등 여러 위대한 아제르바이잔 튀르크어 시인들을 거치며, 오스만어와 아제르바이잔어가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하여 독자적인 어휘적, 음운적 기초를 갖추어, 마침내 서로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세 문어의 형성은 아주 기나긴 과정이었다. 사회의 교육받은 계층이 기록된 언어에서 공통적인 기준을 뽑아내는 동안 기록된 언어는 아주 느린 속도로 퍼져나갔는데, 매우 고된 일이었다. 이외에도 언어의 지역 또는 부족적 특성이 긴 시간 동안 남아있었을 것이고, 방언 역시 각 저자들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16세기 초 술탄 셀림 1세가 샤 이스마일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오스만제국은 아나톨리아 동부를 확고히 장악하여, 아나톨리아의 영토적, 정치적 ‘오스만화’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터키어의 이스탄불 방언을 토대로 발전한 오스만 문어의 소아시아, 특히 동부에 대한 확장은 수세기가 걸렸다. 아나톨리아 동부의 시인들 대부분이 여전히 아제르바이잔어를 이용해 작품활동을 했다. 특히 아나톨리아 동부의 비들리스Bidlis의 쉬크리 베이Şükri Bey의 후원을 받은 시인은 술탄 셀림 1세를 찬양하는masnavi ‘셀림나메’를 그 자신이 잘 아는 지방 투르크만 방언을 이용해 썼다. 아흐메트 우유르Ahmet Uğur도 이 작품을 진정 이해하기 위해선 아제르바이잔어를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17세기 유명한 터키의 여행자 에블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는 소아시아 곳곳을 방문하여 각지의 다양한 튀르크(투르크만) 방언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투르크만 방언을 예리하게 관찰한 결과 디야르바크르 지역의 방언이 특히 이스탄불 방언과 다르고, 아제르바이잔어(그의 표현을 빌자면, 페르시아적인acemane kelimat)에 가까움을 알게 되었다. 에블리야 첼레비는 『여행의 서Seyahat–name』에 디야르바크르 투르크만 방언의 표현을 이스탄불의 것과 비교하여 이를 증명했다.

mänim kimi―benim gibi [나와 비슷한];
bäs män netmişäm?―ya ben neyledim? [내가 뭐한거지?]
körpi―köpri [다리]
qurğuşun―kurşun [납]
iräli―ileri [앞]
öz özümä―ben bana [나 스스로]
Hey kişi, pisik kimi mavlamagilän―Hey adam, kedi gibi çağırma, diyorum [이봐, 남자가 되가지고 고양이처럼 울지 말라고 내가 말하잖아.]

다른 유사한 예는 에블리야 첼레비가 전하는 이야기로, 오스만 술탄 무라드 4세는 동부 (투르크만) 방언의 찬미자로, 이라크와 디야르바크르 사람들의 ‘페르시아 방언Ajamian dialect’를 듣기를 즐기고, 그 스스로도 방언을 사용하기를 즐겼는데, män şöylä demişäm; män häzä böylä demişäm [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란 발언이 예이다. 여기의 이라크와 디야르바크르의 ‘페르시아 방언,’ 즉 şark lisanı [동부 방언]는 분명 나시미와 피줄리의 작품에서 보이는 중세 아제르바이잔어의 기초가 도니 투르크만 방언을 의미한다.

오스만제국과 사파비제국, 무굴제국, 우즈벡한국

동시에,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형성된 문어는 오스만 방언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를 부르는 명칭은 Türki Osmani [오스만 튀르크어], lisan–i Osmani [오스만어], lisan–i Rumi [룸어]이 있다. 이 언어는 동쪽으로 점차 나아가는 오스만 국가의 영토 확장에 따라 소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오스만어의 확장에 따라 지방의 투르크만 방언들은 우리가 아제르바이잔어라 부르는 튀르크어적 특성을 점차 잃고 동쪽으로 몰렸다. 푸아트 쾨프륄뤼는 이렇게 적었다. “이라크와 아나톨리아 동부의 문어는 오스만 국가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아제르바이잔어에 속했다. 오스만 침략 이후 아제르바이잔 방언은 이곳의 구어로만 남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인들이 정치적 중심[이스탄불 - 인용자 주]의 물질적, 정신적 영향을 받아 오스만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고, 아제리어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14세기 ‘번개Yıldırım’ 바예지드와 카드 부르하넷딘 아흐메드의 싸움, 15세기 후반의 ‘정복자’ 메흐메드와 우준 하산의 싸움, 16세기 초의 술탄 셀림과 샤 이스마일의 싸움은 단순리 군사-정치적 분쟁이 아니다. 이 분쟁에 따라 근동의 두 주요 튀르크 민족 문화의 경계가 형성되었고, 따라서 두 튀르크 문어 ─ 오스만어와 아제리어 ─ 의 영향력도 결정되었다. 현재 터키어와 아제리어의 사용권은 14 ~ 16세기에 거의 결정 난 것이다.

고전기 아제르바이잔어는 터키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세에 불리는 방법이 다양했다. 앞서 언급되었듯, 나바이는 튀르크멘어Türkmeni라 불렀다. 15세기 아제르바이잔어의 특징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할릴로프Sh. Khalilov에 따르면, 15세기 아제리어가 퍼진 지역은 북쪽으로는 데르벤드,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남쪽으로는 페르시아 걸프해에 달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과 그 인근을 지배한 카라코윤루와 아크코윤투 투르크만 국가의 지배 왕조들은 salatin–i turkmaniya [투르크만 술탄]이라 불리었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나톨리아 동부는 사료들에서 Türkman eli [투르크만의 나라]라 불리어는데, 이는 당시 그 지방 사람들이 투르크만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웃 국가들 역시 투르크만Turkman이라는 민족명을 아제르바이잔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러시아 사료들에서는 아제르바이잔어를 투르크만어라 부른 용법이 19세기 초반까지도 보인다. 1836년에 쓰여진 『트란스캅카스의 러시아령Obozreniye Rossiyskikh vladeniy za Kavkazom』에는 이런 서술이 존재한다. “시르반의 주요 언어는 투르코만어로, 아제르바이잔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우리는 타타르어라 부른다. 이는 터키어와 유사하며, 양 언어 화자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트란스캅카스 지역에서는 이 언어를 ‘튀르크어Turki,’ 즉 터키어라 부르며,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차용어가 다량 존재하며, 음악적인 언어이다. 배우기 쉽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유럽의 프랑스어 마냥 쓰이는 것이 놀랍지 않다.” 또한 미노르스키V. Minorsky는 샤 이스마일 하타이의 작품을 포함한 고전 아제르바이잔 문어를 ‘투르코만 터키어Turcoman Turkish’라 불렀다.

그러나 16세기 초부터 사파비 국가가 설립되기 시작하자, 투르크만이라는 민족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서서히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그 빈자리는 크즐바쉬Qyzylbash라는 용어가 채워, 지방의 튀르크계 부족민 또는 국가명으로 사용되었다. 간제이에 따르면 사파비 시대 몇몇 작가들은 고전 아제르바이잔 문어를 오스만어나 차가타이어와 구분하기 위해 크즐바시어Qyzylbashi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역사적 현실을 명확히 반영하지 못하여 서구 학자들은 대개 사용하지 않는다.

아제르바이잔 문어를 연구하는 서구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언어가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나왔고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중세 시대에도 이렇게 불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는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중세 사료들 어디서도 아제르바이잔어Azerbaijani language라는 용어가 사용된 적이 없으며,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19세기 미르자 카젬벡Mirza Kazem–Bek이 상기한 『터키-타타르어 문법Grammar of Turkish–Tatar Languages』에서이다. 둘째는 이 언어가 사용된 범위가 아제르바이잔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중부와 동부, 이라크, 이란, 호라산 등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아제르바이잔 고전 문어a language of Azerbaijani classical literature’라 불린 언어에 대해 서구 학계는 중세에 가졌던 특성을 정확히 반영하는 명칭을 요구하고 있다.

다양한 중세에 글을 남긴 많은 작가들은 이 언어를 튀르크어Turki라 불렀는데, 튀르크어 화자türki–zeban를 자칭한 피줄리가 그 예이다. 그러나 오스만어나 차가타이어를 비롯한 다른 문어들 역시 같은 호칭으로 불렸기에, 혼동의 줄 여지가 너무 크다.

중세에 아제르바이잔어를 칭하는 또 다른 명칭으로는 페르시아 튀르크어Türki Acemi가 있다. 이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프랑스의 선교사이자 여행자인 라파엘 두 만스Raphaël du Mans의 책 Estat de la Perse en 1660이다. “이 나라 [이란: 인용자 주]의 튀르크어는 페르시아 터키어Turc Agemi라 불린다. 오스만 터키어Turc Osmanlou에 비해 부드럽게 들린다. 이는 오스만 터키어가 아랍어와 마찬가지로 후두음을 많이 쓰는데 반해, 페르시아 터키어는 순음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때문에 간제이나 요한손L. Johansson, 일디코 벨레한Ildikó Bellér–Hann과 같은 서구 학자들은 중세 아제르바이잔어는 페르시아 튀르크어Türki Acemi라 불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벨레한에 따르면, “이 용어는 혼란스러운 튀르크어Turki보다 중세 아제르바이잔 문어를 지칭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이 용어가 다른 언어를 가리킨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용어를 사용하면 이 언어가 사용된 넓은 지역을 모두 처리할 수 있다. 셋째로, 17세기 저자들 역시 오스만어, 즉 터키어에 다르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이 명칭을 사용했다.” 즉, 몇몇 서구학자들은 중세의 아제르바이잔어가 유프라테스부터 아무다리야까지 포괄하는 페르시아Ajam 지역(세이피 첼레비의 정의)에서 사용되었음으로, 페르시아 튀르크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문헌학자와 언어학자, 역사학자 등이 모두 모여 더 세심하고 광범위한 토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몇가지 세밀한 주제를 언급하겠다. 우선 라파엘 두 만스의 페르시아 터키어와 오스만 터키어라 부른 두 언어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냐 하는 문제이다. 언어적 차이는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 사회 내부의 민족적 분화를 반영하여 동시에 일어난듯 하다. 푸아트 쾨프륄뤼에 따르면 셀주크 시대의 튀르크어 화자 집단이 몽골 침공의 결과로 서진하게 되어 아제르바이잔과 아나톨리아 동부에 진입하여 셀주크 시대 이미 정착한 오구즈Oghuz(투르크만/투르크멘)어 화자들에 추가되었다. 이 시점에 셀주크 시대 최초로 진입한 튀르크 정착자 세대는 차츰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었으나, 이들을 통해 회복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나톨리아 동부의 새 이주 물결은 공통적 셀주크어 사회와 구분되는, 새로운 독립된 아제르바이잔 ‘방언’이 형성되게끔 하였으나, 사실 이 시기만 하여도 이 언어와 셀주크-오스만 방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터키어가 진화하는 동안 아제르바이잔어 역시 페르시아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으며 발달하여, 점차 차이가 커져갔다.

일디코 벨레한이 15세기 말, 최초의 아제르바이잔어, 즉 페르시아 터키어로 쓰여진 『하타이의 역사Tarikh–i Khatai』를 언어적으로 분석하여 유의미한 해석을 도출하였다. 쾨프륄뤼나 에르긴, 간제이, 되르퍼G. Doerfer의 선행연구와 마찬가지로, 벨레한은 일반적으로 서부 오구즈어라 기술되는 언어가 셀주크 시대 소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근동 국가들 전체의 코이네koine로 퍼져나갔다. 몇몇 학자들은 서부 오구즈어를 ‘원아나톨리아 튀르크어old Anatolian Turki’라 부르기도 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2개로 갈라졌다. 현대 터키어의 조상인 오스만 터키어와 현대 아제르바이잔어의 조상인 페르시아 터키어가 그것이다. 현존하는 역사-언어학적 증거 모두가 갈라진 시점을 오스만어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터키어가 서부오구즈어와 달라지기 시작한 14세기 후반을 가리키고 있다. 저자는 13세기의 인물인 아제르바이잔 시인 하사노을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학적 특징을 세밀히 살펴본 결과, 그의 시대에 서부오구즈어로부터의 분화가 일어났다고 확언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벨레한은 용어상terminological의 차이가 있긴 하나 푸아트 쾨프륄뤼나 에르긴의 설과 자신의 설이 같다고 주장했다. 어쨋건 쾨프륄뤼는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에 존재한 튀르크어가 14세기 이전의 것이며, 이 시기 이후 언어적 차이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앞서 언급된 정보들을 볼때, 셀주크 시대에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에 존재했던 튀르크 공통어common Turkic language(서부 오구즈어 등, 다른 이름도 좋다)는 14세기 말기부터 갈라지기 시작하는데, 2개의 주요 갈래가 있다. 서 아나톨리아어(오스만어)와 아제르바이잔어이고, 두 언어는 이후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민족정치적으로도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 사회가 이 시기에 분리되었기에, 언어적 데이터들에 들어맞는다. 두 튀르크어 ─오스만 터키어와 페르시아 터키어(아제르바이잔어) ─ 의 분리는 이 지역의 튀르크 사회가 분리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이 분화는 언어적 요소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역사적 이유로 인한 것이다. 셀주크 시대의 비교적 통합된 정치적 집단이 분열되자 14세기 후반은 동부와 서부로 갈라져 옛 셀주크의 땅의 중심에서 격돌했다. 역사-정치적 분쟁은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 튀르크 사회의 민족, 언어적 분열을 야기했다.

언어의 성질을 고려해볼때, 이 결론은 타당하다. 일디코 벨레한의 시각에 따르면 페르시아 터키어, 즉 아제르바이잔어가 지리적으로 다른 튀르크어 지역(차가타이어와 오스만어) 사이에 끼여있음에도 독립된 언어로 형성된 역사적 이유는 아제르바이잔이 소아시아(더 정확히는 아나톨리아 서부)의 정치적 중심과 거리가 멀어 그 자체로써 정치적 중심이자 문화적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아트 쾨프륄뤼 또한 아제르바이잔 문학과 아제르바이잔어가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튀르크 사회가 오스만 세계와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제르바이잔 방언이 독립된 언어로 셀주크-아나톨리아 방언과 다르게 형성된 주된 이유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이 아나톨리아의 정치적 중심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존재했고, 카라코윤루나 아크코윤루, 사파비 제국 등 이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한 튀르크계 왕조들이 오스만 국가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핵이 되었기 때문이며, 나중에는 종교적으로는 대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때 셀주크조 아래에서 공통적인 민족문화 집단으로 존재했던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 집단은 14세기 후반 민족적, 언어적으로 분화되었다. 그 결과, 오스만어와 아제르바이잔어라는 독립적인 튀르크문어가 중세에 형성되었다.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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