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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오카다 히데히로는 1931년 도쿄 출생으로, 도쿄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미국, 독일에 유학하고 워싱턴대학교 객원교수와 도쿄외국어대학 아시아, 아프리카 언어문화연구소 교수를 거쳐 현재 도쿄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연구 분야는 중국사, 만주사, 몽골사, 일본고대사 등 다양하며, 독자적인 세계사관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일본 전통사학에 회의를 품었다고 해 일본 사학계에서는 ‘멸시파’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1957년 청나라 역사서인 『만문노당』을 연구하여 일본학사원상을 수상했고, 1999년에는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알타이학상(통칭 PIAC 메달)을 수상했으며, 2002년에는 국제몽골학회 명예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저서로는 『역사란 무엇인가(歷史とはなにか)』, 『세계사의 탄생(世界史の誕生)』, 『일본사의 탄생(日本史の誕生)』, 『중국문명의 역사(中國文明の歷史)』, 『몽골제국의 흥망(モンゴル帝國の興亡)』, 『몽골제국에서 대청제국으로(モンゴル帝國から大淸帝國へ)』 등이 있으며 현재 『오카다히데히로저작집(岡田英弘著作集)』(전8권)을 준비 중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그의 저서로는 『세계사의 탄생』(이진복 옮김, 황금가지, 2002),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강유원과 임경준 옮김, 이론과실천, 2010), 『강희제의 편지』(남상긍 옮김, 경인문화사, 2014)가 있습니다.

이 글은 Reuven Amitai-Preiss와 David O. Morgan이 엮은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BRILL, 1999)에 실렸습니다(pp. 260 - 73). 번역한 분량은 약 7 ~ 8쪽 정도 되고 5개 단락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이 글이 옳다! 싶어 번역해서 올리는건 아니고 그냥 같이 의견 나눠보고 싶어서 올리는 겁니다.


칸-황제 제도1)

몽골 제국이 중국인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중국 그 자체이다.

우리가 대체로 중국이라 불리우는 존재의 역사는 서력전 221년에 진시황제가 다양한 종족적 기원을 가진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여 후일 천하天下라 알려질 지역을 정치적으로 통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최초의 중국은 20여 년 간 지속되었으며, 황제가 죽자 옛 왕국들이 되살아났다. 결국 한왕 유방이 승리하여 황제가 되었으나, 천하가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이 일은 60년이 지나 유방의 증손자인 무제의 시기에 이르러 중앙 집권화된 제국이 완전히 복구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최초의 중국이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무제의 재위는 그의 시대를 살아간 역사가, 사마천이 지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 『사기』를 통해 영원히 회자되었다.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이 교차하는, 한 사람이 다 파악할 수 없는 범위에 있는 인간 세계를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잘 쓰여진 역사서는 독자의 세계관을 빚어내는 이데올로기적 힘을 지니는 것인데, 아시아 최초의 세계사인 『사기』는 이후 이어질 중국이란 관념을 정의했다.

사마천은 역사의 시작을 황제의 치세로 잡았는데, 그 서술은 무제의 재위와 무척 닮아있다. 황제와 그의 네 후계자와 함께 묶여 오제五帝라 불린다. 본래 제帝는 단순히 ‘배우자’를 의미하는 말임으로, 오제는 각각 도시 국가들의 수호 여신의 배우자였다. 『사기』는 그들에게 진한 시대 황제의 원형이라는 임무를 주었지만, 그들은 명백히 신화에 속해 있다.

좀 덜 신화적인 역사는 하夏왕조와 함께 시작되는데, 그 최초의 왕은 산과 바다, 즉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 하왕조는 이후 이어질 은殷, 주周왕조와 함께, 천하를 지배한 왕조로써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앞서 언급한 삼조三朝의 아래에서 정치적 통합의 외관이 갖추어 졌다고는 보기 힘들며, 실제로는 수 많은 도시 국가들 가운데 상대적 강자였다. 따라서 진나라 이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중국인의 국가라 할만한 것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동남아시아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고, 그 왕들은 중국 동, 남부 해안에 거주한 월나라 왕들의 시조였다고 전해진다. 하夏와 이夷는 본래 ‘저지대’를 의미했는데, 하 사람들과 이 사람들은 허난 지방의 범람원에 살았다. 남방 태생의 하 사람들과 달리, 은殷과 주周는 그들보다 이후 시기에 북방계 기원을 가지고 북중국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었다. 은殷은 북방 수렵민 적狄에서 기원하였고, 주周는 서방의 유목민 강姜에서 기원하였다. 이상 세 종족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허난 산맥 남쪽의 화전민들과 함께 주周왕국을 만들었으며, 이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이四夷가 있었으나, 이것은 주왕국과 이들 사이를 가르는, 중국이라는 국가적 관념이 존재할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당시 성벽으로 보호되는 도시 안에서 다양한 종족적 기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즉, 진한 시대의 중국인들은 도시 생활을 선택하여 이들 도시 내부의 새로운 종족적 개념을 받아들인 사이四夷의 후예인 것이다.

중국 민족은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문명의 세 구성요소, 중국 문자, 도시, 황제에 의해 정의되었다.2) 중국인은 한문을 읽을 줄 알며, 황제의 칙령을 정확히 이해하며, 황제가 임명한 관리의 통제를 받는 도시에 거주하고, 호구에 기록된 이를 가리킨다. 생물학적 출신은 그의 정체성에 있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중국 민족의 이러한 진화는 사마천이 역사서를 집필하기 얼마 전인 서력전 1세기 무렵에야 완료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황제라는 개념을 세상의 기원으로부터 존재한 것이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 이를 진시황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오제五帝와 삼조三朝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원불멸의 개념이라 치장해버렸다. 이러한 이론은 세계사에서 중국의 기원과 탄생을 같은 것으로 보이게끔 하였는데, 이는 황제와 중국 문명은 동의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저서는 황실 기록을 중심으로 한 황제의 「본기」, 황제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던 개인들의 일대기인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사 흉노는 대 유목 제국이었고, 그들의 선우는 한의 황제와 동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정치 집단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사기』에서도 그 기록은 「열전」으로 분류되었다. 후대의 역사가들 역시 황제가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황제였으며, 세계사는 곧 황제제도의 역사였음으로 이를 따랐다.

『사기』의 기전체는 사마천이 서력전 100년 경의 세계를 묘사하는데는 충분했으며, 그가 만든 중국의 개념은 중국인들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이후 2000년 간 지배했다. 그러나 실제 중국은 고작 400년 간 유지되었다. 2세기 중반 5000만 명에 달하던 중국의 인구는 184년 일어난 황건봉기의 결과로 붕괴, 고작 반세기 만에 500만으로 줄었다. 제1중국 제국의 멸절은 북아시아 집단nation들이 3세기 중국으로의 이주를 감행하게 만들었고, 이들은 곧 진왕조가 내전으로 자멸하는 동안 북중국의 주인이 되었다. 비록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은 황제가 북중국의 상실 이후 남쪽에서 계승되었다고 여겼으나, 이 남조들은 중국에서 쫓겨나 야만인들의 땅에 유배온 신세나 진배 없었다.

새로운 중국 국가는 북방에서 진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사용한 언어는 음운론적으로 한대 중국어가 알타이 제어들의 영향을 짖게 받은 것이었다. 선비에서 기원한 북조, 수는 마침내 남부를 정복하고, 589년 제2중국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실제에 맞추어 새로운 역사서의 양식이 만들어져야 했으나, 궁정사가들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에, 『사기』에서 쓰인 기전체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일인극을 통해 세계와 중국을 서술하는 사마천의 기술은, 또 다른 선비 계통의 왕조인 당의 태종이 유목 튀르크 제국을 복속시키고 카간이 되었을 때 더욱 부자연스러운 꼴이 되었다. 10세기 북중국을 지배한 사타 투르크, 그들을 이은 거란과 여진은 북방 제국Northen empire을 세웠다. 이 제국들은 그들 전통의 왕조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분명히 중국 바깥에 분리되고 독립된 세계에 존재했다. 그들은 결코 중국에 정착하지 않았음으로, 이를 정복 왕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북경은 키타이와 주르첸 칸들의 겨울 숙영지였을 뿐이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중국 정주민들을 위한 행정적 중심 기능을 했을 뿐이다.

몽골은 역사 시대 이래 중국 바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1276년, 쿠빌라이 카안이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을 완전히 흡수하였고, 제2중국 국가는 중앙 유라시아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몽골 궁정의 사가들은 이전과 같이 『송사』에 이전 북방왕조들의 기록을 「열전」에 넣기보다는, 『요사』와 『금사』를 각각 편찬함으로써, 북방왕조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역사 기록의 조정은 하늘 아래 두 가지 동등한 황제제도의 존재가 함께 존재했음을 인정하였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국 황제제도가 가진 중대한 특성, 곧 단일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북 아시아의 칸 제도로 대체되었다. 중국인들은 칸들을 황제라 불렀으나, 이들 황제는 단지 전통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몽골 제국가 그 후계 국가들을 지배하는 칸의 여러 일면 중 중국적 성격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몽골의 원조는 1368년에 중국을 상실했다. 이는 왕조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고 많은 식민지 가운데 하나인 중국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몽골 고원에서 원조는 이후 20여 년간 더 존속하였으며, 왕조의 종말은 1388년, 아릭 부케의 후예가 반란을 일으켜 쿠빌라이 카안 직계 후손을 살해하고 권좌를 빼았았을 때 일어난 일이다. 사실 새로운 칸과 그의 후계자들 역시 그들의 왕조를 다얀Dayan/다윤Dayun(즉, 大元)이라 불렀다. 칭기스 가문과 몽골 부족들은 반(反)칭기스조 부족 연맹인 오이라트에 대항하여 이를 지켜냈으며, 15세기 중반에 다시 일어났다. 몽골인들은 결코 중국의 명 황제들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1) 본 저자의 중국 문명의 성격에 대한 논문들은 대개 일본어로 쓰여졌다. 가장 광대한 범위의 글은 H. Okada, “Higashi Ajia tairiku ni okeru minzoku,” in Kan minzoku to Chūgoku shakai, ed. M. Hashimoto(Tokyo, 1983), pp. 47 – 110.
2) 다른 언어들에서 공통점을 찾기 힘들고, 구어로써 공용어가 없는 중국 문자의 특성에 대해서는 H. Okada, “Shinjitsu to kotoba,” in Ajia to Nipponjin, ed. H. Okada(Tokyo, 1977) pp. 127 – 48 참조.

한족의 명제국

새로운 칸-황제 제도는 새로운 국가를 맞이했다. 명조는 옛 송조의 부활이 아니라 몽골 제국의 많고 많은 후계 국가 중 하나였을 따름이며, 유라시아 대륙적이었다.

영토의 경우, 명조는 두 지역을 제외하면 옛 중국의 국경을 따랐다. 운남과 남만주의 요하 유역이 예외인데, 두 지역 모두 몽골의 유산이었다. 옛 타이 왕국 운남은 쿠빌라이가 즉위하기 전 직접 정복하여 중국이 아닌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요하 유역은 13세기의 내전으로 발해의 종족적 특성을 상실하였는데, 몽골 군대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데려온 고려인 포로들로 이를 대체했다.3) 두 지역 모두 중국이 영토라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이 전혀 없었다. 새 지역에 대한 비중국적 기원은 명조로 하여금 이들 지역에서 몽골 칸들을 계승하여 통치하는 명의 황제라 자칭하게끔 하였다.

명태조 홍무제는 공개적으로 그 자신과 그의 새로운 국가가 몽골인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토곤 테무르 칸이 몽골 고원에서 죽고, 그의 손자(역주: 아들이라 잘못 적힌 것을 손자로 고침) 마이트레야팔라가 중국 군대의 포로가 되었을때, 명의 황제는 죽은 칸에게 순제順帝라는 시호를 바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가 합법적인 황제였음을 인정하였다. 홍무제는 또한 신하들이 과장된 말로 이를 기념하라는 것도 거부하며 말했다. “원조는 백년동안 제국으로 군림했고, 우리 부모들 역시 그들의 아래에서 살았다. 어떻게 그대들은 그런 과시적인 말을 하는가?”4)

명의 황제들이 정치적으로 몽골 황제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는지는 행정기구에서도 드러나는데, 명조의 행정기구는 몽골의 것을 그대로 이은 형태였다.

원대 행정의 최상위 관청은 중서성中書省, 추밀원樞密院, 어사대御史臺 3가지였는데, 이 모두 쿠빌라이 카안의 쿵기라드 씨 황후, 카부이 카툰과 연관되어 있었다. 중서성은 칸을 모시는 중국 군벌들의 총회로, 쿠빌라이와 차부이의 아들 태자 친킴이 외사촌인 잘라이르 부의 안툰Antun의 도움을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1262년 이단李壇의 반란 이후, 중서성은 태자 주변의 한인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기관으로 바뀌고, 군정을 담당하는 기관은 추밀원으로 바뀌었으며, 이 관청 역시 태자가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임명되었다. 어사대는 최초에는 칭기스 칸의 말제 테무게 옷치긴의 손자, 타가차르가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최초에는 관청을 책임졌으나, 후일에는 왕공들의 입맛대로 칸을 퇴위시키는 주축이 되었다. 또다른 주요 관청으로는 상서성尙書省이 있는데, 나중에는 중서성에 합쳐졌다. 역사적으로 상서성은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나, 원조에서는 순수하게 쿠빌라이 카안의 수입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차부이 카툰의 총신, 바나카트의 아흐마드가 이끈 경제 관련 기구였다.5)

원조의 이와 같은 관청들은 시황제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중국의 행정구조와는 크게 달랐는데, 홍무제가 물려받은 것은 몽골 원 제국의 행정기구였다. 1380년 홍무제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신하들을 숙청하고 세 주요 관청을 장악한다. 그는 중서성은 폐지하여 그 아래 육부를 황제 직속 기구로 만들었다. 원대 추밀원이었던 대도독부大都督府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로 분할되어 각각이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졌다. 어사대는 잠시 혁파되었다가 도찰원都察院이란 이름으로 부활하였으나, 그 수장은 좌 ·우도어사左右都御史로 나누었다.

명조에서 보이는 또 다른 몽골 유산은 지방행정 구조이다. 명조는 황자들을 각지의 제후왕으로 분봉하여 군대를 맡겼는데, 당이나 송대에 이러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를 몽골의 관습이라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몽골 사회에서 모든 관직은 개인적인 것으로, 관료제적 원칙 따위는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원대 중국에는 통일된 지방 행정 조직은 존재한 적 없었다. 『원사』의 「지리지」는 12개의 지방 행정 단위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주지만, 이는 허상으로, 명의 편찬자들이 『사기』의 포맷을 그대로 빌려오면서 일어난 일이다. 사실 원조에서는 각 도시 혹은 지역의 사람들은 몽골 정복 시기 부족장들의 가문에 종속된 처지였다. 때때로는 지역 전체가 왕공의 봉토이기도 했다. 몽골 스타일의 이러한 분배를 명조가 모방하여, 중국식 왕조임에도 부족-봉건적 외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다른 예는 군사 제도이다. 여타 중국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명조 황제 권력의 진정한 배경은 유교관료들이 아니라 군대였다. 명조는 명태조 홍무제의 개인적 추종자들의 후손들인 군사 귀족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고향인 안휘安徽 지역에서 유별난 특권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황제에게 있어 고향 부족과 같은 존재로, 원 궁정의, 몽골 칸들 주변의 유목 부족장들에 비교할 수 있다.

명조 군대의 정치적 중요성은 홍무제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영락제가 반란을 통해 황제를 찬탈했을때 크게 상승했다. 새로운 황제는 몽골 고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북경을 수도로 정했다. 이 선택은 그가 단순한 중국의 황제가 아닌 몽골 제국의 칸이 되고자 했음을 알려준다. 북경은 온전한 중국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이동으로 장성을 따라 있는 구변진九邊鎭의 정치적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후대 황제들은 즉위시 이들 병사들을 매수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다. 정덕제가 선부宣府에서 사치를 부리며, 장군의 의복을 입고 몇 년을 보낸 것은 북경 궁정의 지루함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이 상황은 유학적 전통의 해석과 달리 명조의 황제권이 관료행정보다는 군대에 더 기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무제가 인구를 십진법 체계로 조직한 것 역시 몽골이 남긴 유산인데,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북방 아시아의, 즉 흉노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황제는 병사들의 가구를 군호軍户로 편성하고, 그 위에 백호소白户所, 천호소千户所, 위衛를 두었다.(역주: 위소제) 이후 그는 이 체계를 민호民戶에게까지 확대하였는데, 백호소의 위치에 리里를 두고 그 위에 현縣을 두었다. 군 지휘관이 대대로 이어지는 것 역시 몽골적이었는데, 이들은 선부選簿(아직도 남아있는 기록)에 기록된 바를 토대로 지방 군대를 이끌었다.

명조 치하 성리학이 관료들의 철학적 오소독스였으나, 이 지위 역시 몽골에 빚진 것 이었다. 남송 정권 몇차례 이단으로 선언되었으나, 원조 아래에서 과거科擧를 통해 최초로 고전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어떤 측면이든 대명제국은 대원제국의 축소판이었다.6)

3) 명대 만주 남부의, 고려 기원의 중국어 사용 인구에 대해서는 H. Okada, “The Koreans in Manchuria in the Yüan times,” Han-kuo Hsüeh-pao, 5 (1985) 참조.
4) 『명사』, 2. 태조, 홍무 3년.
5) 쿠빌라이 카안이 만든 중앙 행정 기구의 개인적 성격에 대해서는 H. Okada, “Mongoru no tōitsu,” in Kita Ajiashi (shinpan), eds. M. Mori & N. Kanda(Tokyo, 1981), pp. 169 – 82 참조.
6) 명 정치 구조의 특성에 대한 개괄적 설명에 대해서는 J. Matsumura, “Kojiki kara Kōtei e,” in Shikinjōno, ed. N. Kanda(Tokyo 1968), pp. 29 – 55 참조.

만주의 청제국

만청 역시 중국의 정복왕조로 볼 수 없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기 9년전, 최초의 청황제 홍타이지는, 1636년, 묵던에서 만주팔기와 16 내몽골 부족들, 중국 군대의 선출을 받고, 최후의 몽골 정통 칸 차하르 투멘의 릭단의 미망인으로부터 대원옥새를 얻어 황제로 선출되었다. 옥새가 만주 집단에 전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라는 천명으로 받아졌음으로, 홍타이지는 다이칭Daicing이라는 새 국가를 만들고, 스스로를 세 언어, 만주어로는 고신 온초 후왈리야순 언두링거 한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로 아군다 우루시옉치 나이람다고 복다 카간Aghunda Öröshiyegchi Nayramdaghu Boghda Qaghan, 중국어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 하였는데, 모두 “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신성한 칸-황제”라는 의미이다. 이 세가지 칭호는 칭기스 칸으로부터 이어져 온 몽골 제국의 전통을 완전히 복원·계승하였음을 보이는 것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으로, 옛 몽골 제국의 동쪽 절반을 청이 지배하는 것을 합법화했다.7)

따라서 청을 중화제국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틀린 관점이며, 중국은 청의 식민지들 중 하나이며, 한족 신민들은, 숫자가 절대 다수였음에도, 만주 정권 아래에서 정치·문화적으로 소수였다. 『대청율례大淸律例』는 단지 한족 신민들만을 위한 것으로, 제국의 나머지 신민들은 체계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8)

청의 칸-황제적 요소는 이러한 관점의 일례일 뿐이다. 한족 신민들은 청의 칸-황제를 진시황제와 한무제로부터 이어져온 정통 중국 황제로 보았다. 몽골 등 여타 유목 종족들은 청의 지배자를 칭기스 칸으로부터 이어져온 그들의 부족 연합을 이끄는 지배자, 칸으로 보았다. 티베트인들에게 그는 쿠빌라이 카안의 전통을 이은, 티베트 불교 세계의 위대한 후원자였다. 동 투르키스탄의 무슬림 인구들은 그를 1758/59년 이전의 지도자, 준가르 홍타이지khong taiyji를 대체한 일리Ili에 기거하는 장군伊犁將軍을 통해 간접적인 지배자로 생각했다.

7) 세계 정복자 몽골 황제위에 대한 만주의 주장에 대한 현대의 논의는 “The Yüan Imperial Seal in the Manchu Hands: The Source of the Ch’ing Legitimacy,”로, the 33rd Meeting of the Permanent International Altaistic Conference, Budapest, June 24-29, 1990에서 발표되었다. Altaic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s (Budapest, 1992), pp. 267 – 70 참조.
8) 『대청율례大淸律例』는 홍무제가 펴낸 『대명율大明律』에서 그 내용을 거의 따왔기 때문에 비한족 신민들에 적용된 사례가 없다. 청 제국의 각 종족은 각기 다른 법률을 적용받았다: 만주족은 『팔기칙례八旗则例』 한족은 『대명율大明律』, 티베트와 몽골족은 『이번원칙례理藩院则例』, 동 투르키스탄의 무슬림은 『회동칙례會同则例』의 적용을 받았다. M. Shimada, Shinchō Mōko Rei no Kenkyū 참조.

중화민국

중화민국은 최후의 청 황제가 1912년 퇴위했을 때 자신들이 그 제국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으나, 몽골과 티베트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외몽골의 몽골인들은 민국의 성립 이전 청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우그라의 젭춘담바 호톡토Rje-bstun-dam-pa Qutughtu를 칸으로 선출했다. 티베트의 청 군대가 후퇴하자, 13세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라사로 귀환했다. 1912년 12월, 몽골과 티베트는 친교를 맺으며 그들 각각을 독립국으로 인정했다.9) 일본 지배하의 만주와 신강 지역은 실질적 지배를 하기에 너무 멀어, 중화민국은 대륙에서 중화세계와 그 바깥 일부에서만 존재했다.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중화민국은 중화 제국 전통만을 이었을 뿐이다. 청말, 청일전쟁의 치욕적인 패배 이후 옛 제도들은 일본으로부터 전파된 신식으로 채워졌다. 일본화는 언어나 군대에서 가장 크게 이뤄졌다. 중국 민족주의Chinese nationalism는 민국 시절에 만들어졌는데, 일본화의 결과로, 한족에게 아주 오랜 기간 야만인들과 섞이지 않아 인종적으로 단일한 중국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주었다. 현재 중국의 새로운 국가 인식은 사마천의 세계관과 연사관의 부활일 뿐이지만, 현대 중국인과 외국의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9) U. Onon & D. Pritchatt, Asia’s First Mordern Revolution (Leiden, 1989), pp. 111 – 13.

중화인민공화국

명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가였던 중화민국과는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이 아닌 몽골 제국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지배 역시 티베트 불교 종단들이 원조나 청조 아래에서 몽골·만주 칸-황제들과 맺었던 역사적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임을 뜻하며, 현재 영토를 영유하는 정치적 정당성과 권리 역시 최종적으로는 칭기스 칸에게 빚진 것이다.

결론

몽골 제국은 아시아와 동유럽에게 있어, 서유럽의 로마와 같은 역할이다. 천명에 따라 칭기스 칸이 묶은 정치체는 러시아의 칸-짜르가 옛 몽골 제국 서쪽 절반을 지배할 수 있게 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을 형성시켰다.10) 따라서 동쪽의 중국과 서쪽의 러시아는 현재까지 남은 몽골 제국의 가장 커다란 유산이다.

10)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카시모프의 사인 불라트 = 시메온 벡불라토비치에게 전 러시아의 짜르위를 양위한 이반 4세로, 후일 그에게서 다시 제위를 승계하였는데, 이는 칸-짜르에 있어 칭기스조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짜르’는 카잔과 아스트라한에서 ‘칸’을 번역한 것이다. 즉, 러시아 ‘짜르’ 역시 최초에는 칭기스 칸에게서 나온 것이다. O. Pritsak, “Moscow the Golden Horde, and the Kazan Khanate from a Polycultural Point of View,” Slavic Review, 24 (1967), pp 576 – 8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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