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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ddling two worlds


세속적이고 다원적이며 쾌락주의자인... 그리고 무슬림

오르한 오스마노을루는 H란 글자가 세겨진, 프랑스식 손수건을 부드럽게 들었다. “이건 제가 가진 고조부, 칼리프의 유일한 유산입니다.” 그의 가문은 빛나는 시대로부터 참 멀리도 왔다. 압뒬하미드 2세는 오스만조 이스탄불의 심장, 이을드즈 궁에 살았다. 오르한은 이스탄불의 버스노선 끝자락에 있는 지역의 고층 건물에 살고 있다. 칼리프제가 살아있을 무렵에는 유럽의 왕족들도 찾아왔지만, 오르한의 딸이 결혼할 때는 터키의 지도자들도 오지 않았다. 제일 끔찍한 것은, 이라크의 사기꾼이 오스만 가문이 수백 년 간 소유했던 칭호를 훔쳐간 것이다.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야만적인 창조물인 이슬람 국가는 칼리프국의 부활을 약속했다. 바그다디 양반은 뭘 이야기하는줄이나 알고 있을까?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1300여 년 간 칼리프, ‘대리인’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남기고 간 이슬람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기간 존재했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에 비길만한 오스만 제국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흑해 대부분, 빈의 앞까지 남동유럽에 걸쳐 존재했다. 제국의 수많은 종교와 종족을 상징하듯, 이스탄불에 존재한 칼리프의 궁정에는 여러 언어가 사용되었다. 프랑스어는 오스만 궁정의 공용어lingua franca였다 페르시아어, 아르메니아어, 아랍어도 들려왔다.

칼리프는 교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876년부터 1909년까지 재위한 압뒬하미드 2세는 독실한 이슬람주의자였으나, 음악─IS는 금지했다─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가 자란 궁정에서는 공주들이 연주하는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금박으로 장식된 피아노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라일라 하늠은 왕자들에게 첼로를 가르쳤다. 목요일 저녁에 압뒬하미드는 수피 스승들이 염신念神(dhikr)하는데 참석하고, 금요 기도 때는 모스크 앞에서 황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오펜바흐를 들었다. 오케스트라는 국가의 연회에서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형, 궁정 악사 “파샤” 쥬세페 도니체티의 것을 포함한 여러 협주곡을 연주했다. 최후의 칼리프, 압뒬메지드 2세는 남녀 관중들 앞에서 바이올린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었다.

단순히 코란과 무슬림 순나만 읽는 것이 아니라, 압뒬하미드 2세는 스파이 소설을 좋아하기도 했었으며,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팬이라, 여러 차례 개인 극장으로 초청했었다. 이스탄불 빌기 대학에서 오스만사 교수인 수라이야 파루키Suraiya Farooqi에 따르면, “압뒬하미드는 정치적으론 보수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베르디에 빠져있었어요.” 오스만인들은 최신 패션도 신경썼는데, 대개 베네치아를 통해 수입되었다. 옛 오스만 은행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 직원들이 깨끗한 영국식 플록코트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894년, 스뮈르나, 지금의 이즈미르의 주목은 산악 제이벡zeybeks(민병대)들이 헐렁한 바지 입는 것을 금지했는데, 그가 보기에 보기 흉해서였다.

다른 유럽의 지배자들과 섞이기 위한 노력으로, 칼리프는 새 궁전의 설계를 유럽 최고의 건축가들에게 의뢰했다. 압뒬하미드 2세의 아버지, 압둘메지드 1세는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배기의 톱카프 궁을 떠나 신바로크 양식의 보스포러스의 파도가 보이는 돌마바흐체로 옮겨갔다. 해협을 지나가는 배들은 창문 사이로 비치는 버밍엄에서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샹들리에가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세기 칼리프들은 합스부르크나 로마노프 가문의 황제와 같이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코츠대학교의 아나돌루 문명 연구 센터의 도서관장 메흐메트 켄텔의 말이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압뒬하미드 2세의 후예들은 어림잡아 300억 달러에 달하는 이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IS의 우상파괴자iconoclast들과는 좀 달랐다. 최후의 칼리프들은 예술을 후원했다. 압뒬하미드 2세는 프랑스 출신의 화가 피에르 데지레 기유메Pierre Désiré Guillemet와 그의 아내를 제국의 첫 미술학교 설립시 고용했고, 이탈리아 출신의 파우스토 조나로 Fausto Zonaro를 궁정화가로 임명했다. 조나로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압뒬하미드 2세 본인 역시 포함되어 있었는데, 압뒬하미드의 그림은 아직도 돌마바흐체에 남아있다. 「숙고」는 압뒬메지드 2세가 아내, 셰흐수바르Şehsuvar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베일을 안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압뒬메지드의 또 다른 그림은 「하렘의 베토벤」으로, 셰흐수바르는 또 한번 베일을 쓰지 않은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트리오 가운데는 압뒬메지드의 또 다른, 캅카스 출신의 배우자가 있고, 첼로를 연주하는 남성도 보인다. 그 주변은, 다시금 강조하지만, 유럽식 가구들과 베토벤의 흉상이 놓여있다. 하렘에 대한 오리엔탈적인 환상도, IS의 수도, 라카에 광신적으로 분리되어 형성된 푸르다purdah(역주: 이슬람 국가들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집안의 별도 공간에 살거나 얼굴을 가리는 것)도 찾을 수 없다.

「숙고」 또는 「하렘의 괴테」. 압뒬메지드 2세의 부인 셰흐수바르

「하렘의 베토벤」. 바이올린 연주자 셰흐수바르, 피아노 연주자 하티제(압뒬메지드의 또다른 부인), 첼로 연주자 외메르 파루크(압뒬메지드의 아들), 청중의 한사람인 압뒬메지드.

궁전을 서구 문화만으로도 재단할 수 없다. 압뒬메지드 1세는 스위스 건축기사 2명, 포사티Fossati 형제를 고용하여, 하기아 소피아─콘스탄티노플 대주교좌에서 모스크로, 그리고 마지막엔 박물관이 된─를 개조하여, 비무슬림들이 무슬림들이 예배하는 것을 위쪽에서 볼 수 있는 갤러리를 설치해달라 의뢰했다. 포사티 형제는 최초의 오페라하우스, 대학, 법정을 디자인하였고, 이는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스의 건축가 니콜라이 칼파Nikolai Kalfa는 압뒬하미드 2세의 이을드즈 하미디예Yildiz Hamidiye를 설계했다. 수많은 극장, 그림자인형극장, 음악당이 도시를 포장했는데 『이스탄불 극장 사전』의 양만 해도 3권이나 된다. 축구에 대한 전통적인 반감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칼리프의 아들, 외메르 파룩Ömer Faruk은 도시가 영국에 점령 되었을때, 이스탄불의 프리미어 팀, 페네르바흐테의 구단주였다.

19세기 칼리프들 아래에서, 이스탄불은 ‘근대적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다. 필립 만셀Philip Mansel이 그의 책, 『콘스탄티노플:세계가 욕망하는 도시, 1453년 ~ 1924년Constantinople: City of the World’s Desire, 1453-1924』에 적은 바에 따르면 말이다. 최초의 공식 신문 「모니퇴르 오토만Moniteur Ottoman」은 최초에는 프랑스어로, 그리고 이어서 오스만 튀르크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발간되었다. 압뒬하미드 2세는 제국 전역의 모스크 입구에 시계탑을 세움으로써 시간에 대한 동방적 관념을 서구화했다. 압뒬하미드는 유럽에서 두번째로 지하철을 만들었다. 또한 압뒬하미드는 전보를 도입하였다. 최초의 오리엔탈 특급은 1889년, 파리와 콘스탄티노플 사이를 오갔는데, 메디나로 가는 순례 철로가 깔리기 20년이나 전이었다.

오스만인들의 종교에 대한 관점 역시 순진한 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칼리프는 제국의 여러 집단들에 대해 서로 다른 법률을 적용했다. 1839년 이후 압뒬메지드 1세는 법률 체계를 개조했는데, 샤리아와 함께 세속 법을 소개한 것이었다. 압뒬메지드는 비무슬림들에게 무슬림과 같은 권리를 주고, 재판 없이 술탄이 관료를 처형할 수 있는 권리를 폐지하고, 노예 무역을 금지하였으며, 궁정의 봉급을 받는, 유럽식 화가와 작곡가들이 가득 찬 터번tavern을 여는 것을 허락했다. 칼리프들은 음주 역시 즐겼는데, 자유주의적 해석에 따라, 특히 예언자의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주류의 경우 더 그랬다. 마흐무드 2세는 무도회에서 샴페인을 홀짝 거리는 것을 즐겼다.

술주정뱅이 칼리프들

술을 마시는 일은 일탈이 아니었다. 런던대학교 오리엔트·아프리카 지역학대 아랍어 교수 휴 케네디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 이전부터 음주는 중세 칼리프 궁정의 근본적인 요소로, 특히 티무르의 시대에 그러했다. 가장 위대한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786년 ~ 809년)은 문예부흥운동을 후원하고, 바그다드의 지식의 집에서 그리스 소피스트들의 저작을 번역하게끔 한 동시에, 방탕한 시인, 아부 나와스─아랍 세계에서 고전적 시를 지은 위대한 시인으로, 음주에 대한 짤막한 시들도 많이 지었다─와 함께 연회를 즐겼다. 『천일야화』를 배회하는 술취한 데르비쉬들 역시 그의 재위기에 모아졌다.

청교도적 인물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칼리프 왈리드 2세는 744년, 그가 메카에서 음주 연회를 열었다는 혐의를 받은 이후 살해당했다. 그래도 음주는 예삿일로 일어났다. 키프로스와 튀니지를 정복한 셀림 2세(1566년 ~ 1575년)은 인사불성이 될때까지 술을 마셔 목욕탕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죽었다.

그럼에도, 칼리프들은 신실했다. 칼리프들은 스스로가 이슬람 뿐만 아니라 여러 신앙들─그들의 보호를 간구한다는 조건 하에─의 수호자라 여겼다. 스페인의 기독교 왕들이 유대인을 추방하였을때, 술탄 바예지드 2세는 배를 보내 그들을 구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의 수도인 동시에, 아르메니아 교회와 오소독스 교회의 수도이기도 했다. (오스만 군대에서 역시 이라크인들은 알바니아인들과 체첸인들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복종이 먼저였다. 압뒬하미드 2세는 아다나 인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30,000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유순한 신민들은 기원과 관계없이 환영받았다. 25년 간 압뒬하미드 2세를 위해 일한 외무장관은 아르메니아인이었고, 궁정을 설계하고 제국 전역에 세워진 시계탑을 만든 이는 장폴 가르니에Jean-Paul Garnier였다.

압뒬하미드 2세가 1896년에 세운, 노숙자들을 위한 병원인 시슬리Şişli의 다륄라제제Darülaceze 역시 빠뜨릴 수 없다. 금각만을 지나는 고속도로 위에서, 황금으로 쓰여진 아랍 글이 세겨진, 마호가니 문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면 사이프러스 나무로 가득 찬 긴긴 뜰이 있는데, 현대 이스탄불의 광란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칼리프 시대로 돌아갈 타입 캡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남쪽에는 모스크가 있으며, 북쪽에는 교회와 다윗의 별로 장식된 시나고그가 있었다. 오소독스 기독교도들과 시오니스트들이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부를 원하고 있을때 마저도, 칼리프는 여전히 그들을 위한 성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최후에는, 칼리프 역시 유럽의 다른 제국들, 합스부르크나 로마노프와 마찬가지로 무너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했고, 칼리프에게 남은 것은 아랍 땅 밖에 없었다.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한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소아시아의 남은 부분을 떼어내 가버렸다. 러시아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그 군대는 손쉽게 아나톨리아 동부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이 이후 칼리프는 아무 힘도 없게 되었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만 제국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뒤,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1년 뒤 케말은 칼리프 직위도 없앴다. 공화주의자들에게는, 이 명목상의 직위마저도 너무나 위험해보였던 것이다. 또한 영국 역시, 중동에서 무슬림들의 부활하고, 이 영향이 인도에 미칠까 두려워 하고 있었다. 케말은 터키 민족주의에서 황실 가족을 똑 떼어냈고, 그 재산도 몰수했다. 그는 돌마바흐체를 자신을 위해 빼았고, 스스로를 아타튀르크, 즉 튀르크의 아버지라 선언했다.

터키 역사책들은 옛 지배자들을 반서구, 반여성적 태도를 가졌고, 폭군에 반계몽주의적이라 조롱했다. 황실 가족은 극빈층이 되어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녔다. 두 명은 베이루트의 택시 기사가 되었다. 또 다른 이는 레바논의 나이트 클럽에서 치터 연주자가 되었다. 반세기 가량 지난 1974년, 터키 정부는 처음으로 남성 후손이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오스마노을루 씨는 다마스커스에서 돌아와, 1985년에 터키 국적을 회복했으며, 조상들의 옛 제국이 존재한 땅 위에서 수출입업을 하고 있다. 호스니 무바라크가 무너졌을때, 그의 사업도 무너졌고, 그는 파산했다.

최근 이슬람주의적 교육을 받은 대통령, 레제프 타이프 에르도안 시대에, 터키는 조금은 측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책들도 덜 조롱하고 있다. 국영 방송에서는 가끔 오스만 가문의 일원들과 인터뷰도 보여준다. 에르도안은 다시 터키를 오스만 제국 시대와 연결하길 원하고 있다. “요 몇 년 간 우릴 좀 존중해주기 시작하긴 했네요.” 오르한의 말이다. 오르한은 며칠 전 차로 네시간 거리인 부르사로 가,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하기도 전의 지배자인 무라드 2세 영묘의 개방 행사에 참여했다. 여전히 오르한은 자신의 신상이 너무 알려지지 않나 두려워하고 있으며, 에르도안이 칼리프 직을 탐하지 않나 걱정도 하고 있다. “기독교도들도 교황이 있는데 우리라고 칼리프가 없을 이유는 없죠?” 돌마바흐체 궁의 압뒬메지드 2세 관 큐레이터에게 물은 말이다.

오르한은 예전에 정당을 만들까 생각도 했었다. 돈만 있었다면. 6세기 만에 1922년 처음으로 오스만 가문의 남성은 선거로 선출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과거 제국이 이 지역에 안겨준 안정과 황실 그 자체에 노스탤지어를 지닌 사람들이 조금 있단다.

압뒬메지드 2세는 작품 몇 점에 역사적 교훈을 새겼다. 탁자 위의 지도에는 루멜리아, 지금의 발칸 반도의 지도가 올려져 있다. 선생은 최근에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인지 좌절인지 스스로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다.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지도를 바라보고 있고, 양복을 입은 소년은 그걸 되찾겠다 다짐하고 있다. 그림 아래에 칼리프는 경고문구를 덧붙였다. “개인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용서하되, 고향을 모독한 이는 용서치 말라.”

무스타파 케말이 칼리프제를 폐지하였을때, 근위대가 이 소식을 전했는데, 그때 칼리프는 이젤 옆에 앉아 잡지를 정독하고 있었다. 그 잡지는 『르뷔 데 뒤 몽드Revue des deux mondes(양세계평론)』였는데, 오스만 제국이 두 세계에 걸쳐 있다가 그런 사단이 난 그 짝이다. 24시간 이내에 압뒬메지드는 스탐불리 역에서 오리엔탈 특급 열차에 몸을 싣고, 서쪽으로, 유럽을 향해 떠나갔다.

1883년, 오리엔탈 특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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