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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 Yaycıoğlu, “Provincial Power-holders and the Empire in the Late Ottoman World: Conflict or Partnership?,” The Ottoman World, ed., Christine Woodhead, Routledge Press, 2011, pp. 436 - 52.

1809년 여름, 오스만-러시아 전쟁의 전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그때, 다뉴브 변경의 제국군에 줘야할 돈을 확보하는 것이 오스만 정부의 최우선 과제였다. 만성적자 덕분에 제국의 재정으로는 전장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제국 참사회는 마흐무드 2세(1808년 ~ 1839년)에게 4명의 대大호족에게 필요한 양만큼 빌리기를 권했다. 대재상은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테페델렌리 알리 파샤Tepedelenli Ali Paşa, 이집트 태수 [메흐메드] 알리 파샤, 잡바르 가문Cabbarzade와 카라오스만 가문Karaosmanzade가 이만한 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 각각은 수천 키세 악체(1 kise akçe = 25,000 akçe: 역주)를 사용할 여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는 제국에 빚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위태로운] 시대에 [제국을] 도울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도움을 보통의 술탄의 명령으로 요구한다면, 그들의 기질 상, 그들은 돈을 보내지 않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를 사용할 것 입니다. 따라서 폐하께서 각각에게 특별히 편지를 쓰시고, 각각 자신에게만 썼다는 인상을 주신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만일 폐하께서 제국의 현 상황에 대해 신중하게 제국의 상황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제국을 여러 방면에서 협공하고 있는 신앙의 적들을 쫓아내는 원정 자금 지원을 보내라”고 요청하시면서, 이 편지들을 적절히 봉하고 황실 관리가 직접 전달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술탄의 명령에 복종하고 충분할 자금을 보낼 것 입니다. 황실의 관료가 이러한 종류의 편지를 전달한다 하여 [술탄국의] 영광을 줄이지는 못 합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예가 몇 차례 있었나이다. 저희는 외부에서 자금을 마련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나이다.

이 지방의 거물들은 단순한 공직자나 전통적인 제국의 엘리트로 여겨지지 않았다. 참사회는 마흐무드 2세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라고 권했고, 예니체리의 수장, 군지휘관, 제국의 구조와 관련있는 태수 등 제국의 고위 관료, 즉 ‘제국의 종복’을 언급하지 말라고 권했다. ‘제국의 종복’들과는 달이 이 거물들은 황궁이나 이스탄불의 관료 집단 또는 제국의 대가문에서 교육받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탄불에 자연적인 인맥이 존재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그들은 지방 행정 단위 여럿을 통제했지만, 누구도 부와 권력을 제국의 군사 또는 행정적 관직 계단을 밟고 올라가지 않았다.

만약 호족들이 제국의 엘리트 집단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막대한 부를 이들에게서 제거한다면 이들을 묘사하기에 적절한 표현은 지방이라는 정체성일 것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지역 단위를 통치했으나, 모두 해당 지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들의 권력 기반은 이스탄불의 관료-군사 집단이 아니라 지방의 사회-정치적 현실이었다. 따라서 황도 이스탄불과 정파에 대한 이들의 충성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 중앙의 여러 정파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들은 정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정부를 위해 뭔가를 한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오스만 제국의 구조 속에서 활동하고, 제국의 관직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제국이 그들을 임명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권위는 그들이 가진 정치, 군사, 경제적 권력이 자율적임autonomous을 인정할 뿐이었다.

황실 참사회는 이 지방권력자들이 제국의 칙령을 심각히 생각하지 않는다 보았다. 단지 술탄이 손수 작성한 편지에 적힌 개인적 요청만이 적절한 대출을 얻어냈다. 마흐무드 2세는 이것이 오스만 술탄이 지방권력자와 대등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두려워 고민하자, 참사회는 이전의 술탄들이 지방권력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 행한 예를 상기시켜줬다. 그 전해인 1808년, 마흐무드 그 자신이 서명한 동맹의 맹세Sened-i İttifak로, 잡바르 가문이나 카라오스만 가문을 포함한 몇몇 지방의 지배자들은 요청이 온다면 술탄과 국가를 위해 군사,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데 동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오스만 세계의 지방권력자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이러한 권력자와 권세가는 오스만 각지에 자리잡았다. 알바니아 북부 부샬틀르Buşatlı 가문이 스쿠타리와 드린Drin의 아드리아 걸프 지역에 형성되었다. 부샤틀르 마흐무드 파샤Buşatlı Mahmud Paşa가 제국의 명령을 몇 차례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문은 아드리아 해의 상업에 대한 역할 덕분에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알바니아 남부에서는 잔니나의 알리 파샤Ali Paşa of Ioannina와 그 아들들이 아드리아 해의 주요 도시들을 시작으로 펠로폰네소스와 테살리까지 영향력을 떨쳤다. 바이런 경이 ‘무슬림 보나파르트’라고 묘사한 알리 파샤는 나폴레옹 시대 국제적 인물이었다. 마케도니아 중부에서는 세레스의 이스마일 베이İsmail Bey of Serres가 주요 인물이었다. 테살로니키와의 교역로에 있는 중요 도시를 기점으로,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다뉴브 불가리아의 주요 인물은 비딘의 오스만 파즈바토을루Osman Pazvantoğlu of Vidin이었다. 지방 도시에 주둔한 예니체리 부대장으로 경력을 시작한 파즈반토을루는 18세기 말 오스만국가에 대한 대반라늘 세번이나 일으켰다. 1803년에 오스만 정부는 비딘의 파즈반토을루 권력을 인정하고 이 변경 지역의 주목으로 임명했다. 파즈반토을루의 경력은 오스만 국가가 반대자를 복종te'dib시키지 못할때, 그에게 관직을 내려 제국 구조 내부로 편입시킴으로써 그를 만족시키는 전형적인 경우이다. 파즈반토을루가 1806년에 죽자, 그의 회계사였던 몰라 이드리스Molla İdris는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파즈반토을루의 재화를 장악하고, 파즈반토을루의 전우들의 충성을 얻어내어, 오스만 정부는 그를 비딘의 태수로 임명하고 이드리스 파샤라는 칭호를 줄 수 밖에 없었다. 좀 더 동쪽에는 루세Ruse(Rusçuk)의 이스마일 아가İsmail Ağa가 다른 다뉴브 강의 도시에서 권력을 잡았다. 루세 신민들이 아얀ayan(‘district overseer’)로 선출한 이스마일 아가는 동료들을 주변 지역의 같은 직책으로 임명했거나 또는 선출되게끔 하여 남쪽과 흑해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806년 이스마일 아야가 암살당하자 루세 사람들은 이스마일의 추종자인 라즈그라드의 관리자 알렘다르 무스타파 아가Alemdar Mustafa Ağa를 초대하여 이스마일의 자리로 선출했다. 알렘다르(바이라크타르Bayraktar로도 알려짐)는 아주 독특한 경력을 보내다. 1807년, 다뉴브 강을 따라 존재한 부대들을 장악한 덕분에 알렘다르는 오스만제국이 러시아에 패배한 이후 지방군 사령관이 되라는 추천을 바닸다.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그는 루세의 태수로 추천되었다. 그 직후 알렘다르는 이스탄불의 개혁파당과 동맹을 맺고 180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지방 명사가 반란을 통해 대재상이 되었다는 이 기묘한 이야기는, 예니체리가 알렘다르 정권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살해했을때 끝이 났다.

제국의 아시아 지역에서는, 마니사의 카라오스만 가문이 아나톨리아의 에게 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792년부터 1817년 사이에 하즈 휘세인 아가Hacı Hüseyin Ağa의 지도 아래 이 가문은 아이든, 마니사, 베르가마 등 아나톨리아 서부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통제하며 이즈미르까지 그 영향력을 떨쳤다. 동쪽에서는 크즐르르막Kızılırmak (Halys) 강 너머에는 보조크Bozok의 차파노을루Çapanoğlu(Cabbaroğlu)가 있었는데, 이 가문의 중심지는 이 씨족이 18세기 초에 세운 도시인 요즈가트Yozgat였다. 쉴레이만 베이Süleyman Bey의 지도 하에 가문은 아나톨리아의 아마시야에서 알레포로, 여러 지방을 장악해나갔다. 쉴레이만의 아들 압뒬페타흐Abdülfettah는 이스탄불로 정착하여 법학자의 경력을 쌓아, 후일 아나톨리아의 카즈아스케르kazasker로 임명받아 제국의 최고 법학자 반열에 올라섰다. 그 북쪽의 흑해 지역 중부는 자니클리Canikli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알리 파샤의 경력 때문에 중요성을 가진다. 자니크Canik를 기반으로 가문은 트라브존을 장악했다. 자니클리 알리 파샤Canikli Ali Paşa의 사후 그 아들 바탈Battal과 손자 타이야르Tayyar는 오스만 정부와의 관계 악화 떄문에 러시아로 도주한다. 이들은 이후 사면되기는 하나, 셀림 3세(1789년 ~ 1807년)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19세기 초반 차판 가문과 자니클리 가문은 아마시야를 두고 갈등을 빚게 된다. 셀림 3세가 차판 가문을 후원하자 타이야르 파샤는 아나톨리아의 반셀림 운동의 지도자가 된다. 1807년, 셀림의 몰락 이후 이스탄불로 간 타이야르는 예니체리의 지지를 받았던 무스타파 4세(1807년 ~ 1808년) 정권에서 대재상 바로 다음가는 지위까지 올라가나, 알렘다르 무스타파의 쿠데타 동안 처형당한다.

더 남쪽의 빌라드 알샴Bilad al-Sham(시리아)에도 눈에 도드라진 인물들이 존재했다. 18세기 초부터 다마스쿠스는 아즘ʿazm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아즘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순례 카라반으로, 다마스쿠스가 성지로 가는 남북 루트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8세기 동안 다마스쿠스의 아즘 정권은 ‘순례의 왕mir-i hac’라 불리었으며, 이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경제, 군사적 특권을 받았다. 해안가에서는 아흐메드 제자르 파샤Ahmed Cezzar Paşa(1804년)가 사이다Sayda(Saida)와 악카Akka의 태수로 있었는데, 보스니아의 모험가 출신이었다. 아흐마드 제자르 파샤는 각지의 가문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집트의 맘루크 귀족 알리 베이 엘케비르Ali Bey el-Kebir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이 지역의 또 다른 거물, 자히르 알우마르Zahir al-ʿUmar에 대적했다. 1775년, 오스만 정부는 제자르 파샤가 이미 성장세에 있는 항구 도시 악카를 기반으로 상업에서 활약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다 태수로 임명하였다. 그의 명성은 1799년, 프랑스의 악카 공성을 버터냄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그 보상으로 제자르 파샤는 빌라드 알샴 전체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허락 받았으며, 잠시나마 아즘 가문에게서 다마스쿠스ㅢ 총독직을 빼앗기도 했었다.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는 발칸 지역을 떠난 또 다른 모험가로, 지방권력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할 거시다. 카발라Kavala 출신의 알바니아인으로, 제자르 파샤아 잔니나의 알리 파샤와 유사한 기원을 지니고 있다. 그의 경력은 1801년,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로 보낸 알바니아 부대의 일원으로 시작되었다. 짧은 프랑스의 점령기와 이어진 영국의 개입으로 맘루크 정권 말기는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불안정했기 때문에 메흐메드 알리 파샤가 이집트 태수로 임명되면서 그의 지위는 빠르게 부상했다. 1809년, 메흐메드 알리는 이집트에서 독자적인 권위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 스케치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기의 지방 거물들을 온전히 설명한 것이 될 수 없다. 다른 여러 개인들과 가문들이 제국의 각지에 존재했었다. 여기서 언급된 이들은 특히 유명한 이들로, 그 부나 권력에 있어 가장 많이 소유한 이들은 아닌 경우도 있다. 이들 권력자와 권세가의 종합적이고 상대적인 부와 권력 설명은 차후 설명될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지방에는 다양한 종류의 엘리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 모두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정리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따라서 이 무슬림 지방권력자들이 어떻게 제국의 관리로써 통치 메커니즘과 협력하고 또 제국과 반목하였는가 조명하는 것이다. 무슬림이건 비무슬림이건 간에 지방의 유력가들은 자연스럽게 소속된 커뮤니티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고, 상인 가문 출신이냐 종교적 엘리트냐, 부족 지배자냐 하는 부분은 여기서 논외이다. 그러나 엘리트와 지방권력자의 특성을 구분하기는 어려우며, 아래에서 서술될 내용 역시 여러 다른 엘리트 집단에 적용 가능한 경우도 존재할 것이다.

가문, 왕조, 지방 그리고 사회

지역적 상황과 사회-정치적 배경은 여러모로 다르지만, 이 지방권력자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가문이 이 기업체의 중심이었다. 요즈가트의 차파노을루나 마니사의 카라오스만오을루, 쉬고더르의 부샤틀르, 다마스쿠스의 아즘 가문, 삼순과 트라브존의 자니클리 가문은 18세기의 여러 시대에 가문의 카리스마적 창건자의 지도 아래에서 그 지위를 굳혔다. 1800년 인근에 잔니나의 알리 파샤나 루세의 티르시니클리 이스마일 아가Tirsinikli İsmail Paşa, 비딘의 오스만 파즈반토을루, 세레스의 이스마일 베이,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 악카의 제자르 아흐메드 파샤 등은 자수성가적 인물이라 평할 수 있다. 이들 역시 권좌에 오른 이후 아들이나 친척들에게 여러 권한을 분배하여 가문의 기업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oğlu나 zade(‘~의 아들’이란 의미)를 이름의 마지막에 덧붙여 가문의 시조가 누군지 표시했다. 예를 들어 Karaosmanoğlu란 카라 오스만의 아들(후예)라는 의미이다.

‘가문’이란 부계 씨족과 그 사돈들을 포함한 말로, 카리스마적 인물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쉴레이만 베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차파노을루나 하지 휘세인 아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카라오스마노을루와 같이 꼭 가문의 원로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문은 잔니나의 알리 파샤나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의 경우에도 보이듯, 거대한 씨족이라기 보다는 여러 부인과 아들, 딸을 거느린 위대한 시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척 집단이 될수도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씨족이건 인척 집단이건 간에 엘리트 가문은 그 회계사, 비서, 집사를 포함한 카프 할크Kapı halkı(문의 사회)도 포함하고 있었다. 경호대 가끔은 소규모 사병은 여러 장교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추종자나 후원자나 일종의 동맹 관계를 형성한 주변 지역의 소규모 가문도 있었다.

잔니나의 알리 파샤의 손자들. L. Dupré 작(1819년)

이들 가문의 지도적 구성원은 관직(태수, 부태수, 시장 등)을 가지고 있거나 세금청부업자로써 해당 지방에 대한 재정을 틀어쥐고 이썼다. 이들 관직이나 청부업자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가문의 남성 구성원들의 몫이었고, 다음 세대로 지위와 부를 세습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쿠르드계나 코카시아계 베이bey 또는 보스니아계 카피탄capitan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오스만 체제는 부와 지위를 세습시키는 원칙이 없었다. 반면 국가는 언제나 관직과 지위를 몰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몰수는 관리의 죽음, 처형 등에 이어져서 이뤄졌다. 따라서 권세가는 지속적으로 부와 지위, 관직을 두고 제국과 끝없이 협상했다. 이들은 이 몰수를 피하기 위해 가문의 일원이 통제하는 기부재단evkaf으로 부를 이관하거나 현물을 몰래 숨겨 제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등 다양한 전략과 기구 수립해야 했다.

18세기와 19세기 지역적 특성은 이러한 가문들이 부와 지위를 계속 보유하고 계승하기 위해 중앙 정부를 위해 일을 해주거나 돈을 줌으로써 거래를 했다는 점이다. 중앙정부는 관직의 계승권을 판매함으로써 때때로 군사적 충동까지 야기하는 값비싸고 복잡한 몰수 과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득이 되었다. 이런 실리적 이유 덕분에 권세가는 부와 지위를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가족관계 이외에도, 지방권력자들은 모두 그 인근 도시, 구 또는 지역과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었다. 이는 그들의 칭호에도 반영되는데, 성씨 다음에 출신지 또는 처음 권좌에 올랐던 장소가 나오는데서 알 수 있다. 잔니나, 즉, 테펠레니의 알리 파샤, 티르시닉의 이스마일 아가, 세레스의 이스마일 베이가 그 예이다. 때때로 이러한 출신명은 씨족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자니클리(자니크 출신의)나 부샤틀르(부샤트/알바니아 출신의)가 그 예이다.

지방 권력자들은 다른 가문들, 사회망, 개인들과 업무적 협력 관계나 정치적 동맹, 인척 관계 등으로 묶여,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지방과 긴밀히 엮여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지방권력자들이 알레비파의 데데dede나 그리스의 코자바시kocabaşı,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의 초르바즈çorbacı, 세르비아의 크네즈knez와 같은 특정한 커뮤니티의 지도자였다는 것은 아니다. 이 권력자들은 오히려 여러 커뮤니티가 존재한 지역 전체의 지배자에 가까웠다. 이들은 지방 상인, 수피 네트워크나 지방 기독교, 유대교 종단인사들과 후원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 집단과 유대감을 쌓았다. 이들은 성채 내부에 궁전, 모스크, 가족묘 등을 짓을때는 공공 시설이나 수피 사원 등을 함께 지음으로써 지방 신민들의 충성심과 집권 정당성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스마일 아가가 루세의 물 공급을 늘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행한 건축 사업은 권력자들이 주도한 공공 프로젝트의 좋은 예이다. 이 일화들은 대중의 이야기, 노래, 비가 등에서 반영되었다. 19세기 초반 차파노을루와 코자노을루 사이의 경쟁을 다룬 민요나 잔니나의 알리 파샤의 영웅담에 대한 그리스와 알바니아의 발라드는 이러한 지방 대중 문학의 예이다.

18세기와 19세기 초반을 거치며, 이러한 가문들은 왕조hanedan, 즉 행정, 경제, 사회적 메커니즘을 통해 특정 지역을 여러 세대에 걸쳐 지배하는 정치적 씨족으로의 형성을 허락받는 경향을 띈다. 지방 엘리트들의 왕조화는 전통적인 제국의 구조와 관직의 박탈과 같은 관행에 반하는 일이었다. 지역의 부와 지위를 여러 세대에 걸쳐 독점하여 많은 가문들은 오스만조와 지배권을 공유하는 지방 권력자로 서서히 변화했다. 이 과정은 잔니나의 알리나 비딘의 파즈반토을루와 같이 강력한 군사력을 형성하는 경우 더 강력한 경향을 띄었다. 이들은 동맹자들을 후원하거나 도적들을 포섭하거나 아예 지배 지역에서 징집하는 방식으로 군사력을 키웠다. 이러한 군사적 능력은, 특히 불안정한 변경 지역에서, 권력자를 군벌로 변화시켰으며,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시켜줬다.

제도의 변화: 태수, 청부업자, 지방감독

지방권력자들이 활용한 제도적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어떤 지역에서 지방권력자들은 스스로 태수의 직위에 올랐다. 다른 지역에서는 부태수로 활동하며, 부재 태수의 이름 아래에서 사실상 태수로써 행동했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지방의 거물이 정부의 직접적인 세금수취청부업자로써 또는 부재한 세금수취관의 대리인으로써 세금수취를 독점하기도 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지방권력자들이 지방 커뮤니티의 선출된 지방감독으로써 해당 군kaza의 행정, 재정 업무를 감독하였다.

전통적인 오스만 행정체제에서는 태수직은 한정되어 있었고, 태수는 봉급으로써 수입처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보상으로 이들은 행정 구역을 관할하고, 티마르, 즉 봉지의 분견대를 제국군대에서 지휘했다. 사회정치적으로 이들 태수의 대다수는 술탄의 궁정 또는 다른 제국 재상가문에서 훈련받았고, 임지보다는 제국의 엘리트들과 더 동질감을 느꼈다. 18세기부터는, 이러한 ‘고전적’인 조정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중앙이 임명한 태수들은 봉지에서 괴리되었는데, 대개 긴 전쟁으로 인해 가문과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꾸준히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장에서 티마리옷의 중요성이 감소함에 따라 지방에서도 티마리옷 부대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고, 증가하는 티마르는 납세령으로 전환되었다.

제국의 태수들은 점차 지방의 업무에서 괴리되었고, 지방의 가문에서 대리인mütesellim을 뽑아 수익을 자신들에게 보내고 부재중의 통치를 대리하게 하였다. 대개 태수들은 단기적인 계약으로 부태수 직위를 판매하였다. 그 결과 지방의 가문들은 부태수직을 구매하여 제국의 행정계층에 편입되었다. 명목상의 태수가 꾸준히 변화한다 하여도, 마니사의 카라오스마노을루와 같은 부태수들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행정가, 사실상의 행정기구가 되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이 변화가 극적으로 일어났다. 잔니나의 알리 파샤, 비딘의 오스만 파즈반토을루,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 악카의 제자르 파샤 등은 부태수 직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태수직을 점거한 뒤에 중앙정부에 뇌물을 지불하거나 세금caize으로 협상하여 태수로 임명받았다. 이러한 태수의 지방화를 제외하면 지방과 당파적 이익을 반영하고 오래 직위를 유지하는, 전통적인 제국 태수 원칙과 대치되는 새로운 유형의 태수직이 나타남으로써 제국과 지방 문민 사회와 협상하는 제국을 반영하게 되었다.

지방 태수직의 변화는 단순히 부태수직의 강화와 태수직의 지방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조세징수도급 체계의 확장을 야기한 점이 가장 중요하다. 18세기 내내 계속된 재정 압박은 중앙정부로 하여금 태수 즉, 티마르 보유자의 관할권이었던 많은 수의 봉토들을 중앙재무부에 세금을 직접 납부하는 민간 청부업자들에게 넘겼다. 착수금muaccele과 연임대mal를 대신하여, 청부업자들은 세금 수취권과 해당 지역의 질서를 유지할 의무를 얻었다. 무엇보다, 말리카네 무카타malikane mukataa라 불린, 종신계약을 맺은 청부업자들은 사람들에게 사법권을 조차하였는데, 법학자들을 제외한 다른 관료들의 침범을 받지 않는, 사법권과 행정적 자치권을 얻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더 나아가, 이 조차는 계승을 보장하지 않았음에도, 조차자의 후계자들은 대개 재계약에서 우선권을 얻었다.

조세징수도급의 확대는 지방 태수직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선, 말리카네 계약자들은 지방권력계층이 지방 행정을 오랜기간 안정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끔 해주어, 특히 조차 계약을 연장할 수 있는 지역에서는 사실상 자치령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지방권력자들은 하청업자로만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조세징수도급 단위의 거물로써 관할권에 속하지 않는 금융이나 재무부나 황실 에브카프evkaf(자선재단)의 통제를 받는 단위도 통제했다. 하청업자들은 세금을 수취하거나 식량 비축, 구매등의 비정규적 업무 역시 요구받았다. 이는 말리카네가 없는 지방의 인물들이 지방과 그 네트워크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지방 세금 업무를 맡을 기회를 줬다.

제도적으로 일어난 세번째 발전은 지방의 권력자들이 행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커뮤니티의 지도자, 즉 아얀 지위가 공식화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아얀이란 용어는 도시 커뮤니티의 지도자를 일컫는 비공식적인 말이었는데, 제국의 아랍 지역에서 나타났다. 17세기 이후로 지방 커뮤니티들은 그들의 지도자(즉, 아얀)를 통하여 행정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로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이러한 자연스레 뽑히는 지도자직은 점차 공식 관직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따라서 아얀 역시 해당 군의 커뮤니티가 공공 재정 업무를 감시하게끔 선출한 이를 일컫는 관직명이 되었다.아얀 ‘선출’은 커뮤니티의 대표자들이 법정에서 누가 지명되고 선출되었는지 발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권위는 개입되지 못했다.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뤄져야 했다. 만일 다른 파당에서 또다른 후보를 내세운다면, 커뮤니티 내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즉, 중앙에서는 제3당을 이용해 후보자를 내세울수도 있었다.

아얀의 최우선 업무는 공공업무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18세기 동안 중앙정부와 태수들은 커뮤니티들에게 세금을 일괄 지급하기를 요구했다. 이는 세금을 지불한 가호들에 대한 상세 정보들이 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앙 정부와 제국이 인력과 자원을 개개의 가호들에서 충분히 얻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얀은 따라서 군 수준의 세금 수취를 감독하고 구단위로 납세자의 담세 능력에 따라 그 부담 정도를 조정하고 커뮤니티의 동의를 얻어내는 업무를 했다. 그 대가로 아얀은 커뮤니티로부터 일종의 커미션을 얻어냈다. 아얀은 지방 치안 유지나 제국군 징집, 식량 비축 등의 업무도 담당했다.

태수냐 부태수냐, 청부업자냐 아얀이냐 하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행정적 회로가 달랐다. 태수직과 부태수직은 지명, 즉 관료적 과정을 통해 임명되었다. 청부업자 지위는 경매와 판매를 통해 이뤄졌음으로 국가와 납세자 농민 사이를 이어주는 ‘상업적’ 거래를 했다. 아얀 지위는 지명과 선출, 즉 신민들을 만족시키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 이뤄졌고, 권력의 기반도 아래에 있었다. 이 길들은 때때로 겹쳐지기도 했다. 어떤 아얀들은 후일 태수가 되었다. 어떤 말리카네 보유자들은 동시에 다른 군의 아얀이기도 했다. 어떤 태수들은 말리카네 계약자일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거래를 통해서 지방권력자들은 이스탄불, 즉 모든 합법적 권위의 출처와 이어지기를 원하게 되었다. 몇몇은 카프 케튀다스kapı kethüdası라 불린 오스만 관료 서클을 대표하는, 중앙 정부가 임명한 대리인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에 대해 정치와 경제 즉 사업과 행정의 분리라는 현대적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는, 행정이 곧 사업이었다. 지방권력자들은 그들의 위신과 지방에 대한 지식과 인맥, 거물로써의 능력을 활용해 군사, 행정적 기업을 운영했다. 산자이 수브라흐마니얌Sanjay Subrahmanyam과 바일리C. A. Bayly가 제시한 ‘관료자본가portfolio capitalist’라는 용어는 무굴제국에서 나타난, 이익을 위해 행정, 사업, 군사 업무를 하던 권력자들을 일컫는 말로, 오스만제국의 지방권력자들에게 적용해도 될듯 하다. 이 체제에서는 행정 활동과 기업 활동은 같은 것이었으며 대개 공공의 필요를 위해 거둬지는 세금과 사익(개인이건 가문이건)을 위한 세금은 분명히 구분할 수 없었다.

기업 활동에서는 강력한 경제적 기반, 즉 자본이 필요하다. 보통 이는 무슬림이 아닌, 대개 아르메니아인이었던 대금업자나 은행가sarraf들에 의해 공급되었다. 이 사라프들은 단순히 현금 융통만이 아니라, 다양한 금융업자들, 청부업자, 제국의 엘리트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마누크 베이Manuk Bey라는 사라프는, 아르메니아 은행가로, 알렘다르 무스타파 아가를 위해 권력 관계에도 관여했다. 마누크는 알렘다르 무스타파와 이스탄불의 엘리트들을 이어줬는데, 알렘다르가 실리스트레 태수직과 다뉴브 야전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나중에 마누크는 알렘다르와 러시아와의 화의를 중재하여, 후일 프랑스에 대항하는 오스만-러시아 동맹의 초석을 놓았다. 왈라키아 출신이었던 마누크 베이는 알렘다르 무스타파가 1808년 대재상으로 임명되었을때 드라고만dragoman이 되었고, 잠시나마 제국에서 제일가는 권세가로 임명되었다.

지방권력자들: 제국의 도전자인가, 신하인가, 동료인가?

최근까지, 오스만제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중앙정부와 지방권력자들 간에 계속된 분쟁을 중앙집권제와 분권제 사이의 긴장으로 해석했다. 이는 근대적 시각으로, 중앙집권화는 국가, 법의 지배, 관료제, 개혁, 진보, 근대를 상징한다. 반대로 분권화는 해체, 몰락, 무정부, 개혁에 대한 반감, 반동을 의미했다. 이렇게 접근하면, 19세기 초반의 오스만제국은 해체되고 있었는데, 그 원인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침공만이 아니라, 제멋대로인 반동 (봉건) 지방권력자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흐무드 2세의 철권 통치와 나중의 탄지마트 개혁 덕분에 오스만국가는 (메흐메드 알리 파샤를 제외한) 지방 거물들을 패배시키고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발칸과 아랍의 민족주의자 역사학은 이 중앙집권-분권 프레임을 그대로 따른다. 민족사적 내러티브의 일부로써, 많은 알바니아 역사학자들은 잔니나의 알리 파샤를 오스만에 반란을 일으킨 알바니아 민족영웅이자 원原알바니아 국가의 창조자로 떠받든다. 그리스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알리 파샤나 세레스의 이스마일 벡이 자치적 지방 정권을 세웠다고 찬양한다. 불가리아의 학자들은 비딘의 오스만 파즈반토을루를 오스만제국에 대항한 이로 상징화하고, 이집트 역사학자들은 메흐메드 알리 파샤가 근대 이집트를 세웠다고 여긴다. 오스만제국에 대항한걸로 보인다면, 민족주의적 내러티브는 이 인물을 ‘민족의 부활’로 발전시킨다.

오스만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간에, 중앙정부와 지방권력자들은 중앙집권화와 분권화라는 양립 불가능한 두 이해 관계의 대표자들이었기 때문에, 끝없이 대립했다. 이 이분법적이고 대립하는 관점은 여러 문제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 시각은 중앙의 엘리트와 지방의 엘리트 사이에 섞일 수 없는 벽이 있다고 오독하고 있다. 중앙에도 여러 당파가 존재했고, 지방에서 각자의 이익에 맞는 동맹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경쟁하는 가문들 또는 개인들 역시 지배층 엘리트 계층에서도 동맹을 얻고 싶어 했다. 1806년 루세의 이스마일 아가는 에디르네에서 셀림 3세가 조직한 신질서에 대항하는 저항을 조직한 것이 예로, 그는 이스탄불의 반反신질서당과 동맹을 맺었다. 1807년 예니체리와 반셀림파의 쿠데타 이후 새 지배파와 새로운 술탄, 무스타파 4세는 자니크의 타이야르 파샤를 2재상으로 초빙한다. 중앙정부에서 타이야르 파샤를 초청한 것은, 신정부가 셀림의 개혁에 반대한 지방세력을 포섭하는 한편 차파노을루와 같은 친셀림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알렘다르 무스타파와 지방 세력이 1808년에 이스탄불의 정권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며, 알렘다르는 중앙정부에 남은 신질서당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예는 중앙과 지방의 여러 집단들 사이에 동맹ittifak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며, 오스만 정치의 양대축을 중앙-정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친개혁-반개혁 대립으로도 해석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재정, 행정, 군사적 업무는 국가가 하향식으로 명령을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협상을 통해 이뤄졌다. 즉, 중앙정부는 하나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리인을 임명하여 명령하기보다는, 지방호족의 대표를 뽑아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관행은 단기적으로는 전시에 군사적 업무에, 장기적으로는(때때로 종신적으로) 청부업자나 관직에 해당되었다. 제국군이 러시아 군대를 막는데 실패했을떄, 중앙정부는 루세의 아얀 알렘다르 무스타파에게 다뉴브 불가리아의 지방 커뮤니티들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다뉴브를 따라 전선을 형성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알렘다르는 실리스트레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알렘다르는 협상을 통해 티르노바Tirnova 군을 추가로 얻어낸 뒤에야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국의 관리로 임명된 뒤에 알렘다르는 제국의 엘리트들과 협조하게 되었다. 때로는 커뮤니티들도 이 협상에 참여했다. 1806년, 영국과 오스만제국 사이의 위기 중에, 이즈미르의 장관 카라오스마노을루 하산 아가는 다르다넬스 방면으로 예상되는 영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차낙칼레로 사병을 이끌고 가주기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이즈미르의 신민들은 이스탄불에게 하산 아가의 지도력이 필요한 것은 이즈미르라며 명령 철회를 요청했다. 오스만정부는 요청을 철회하는 대신 ‘최소한’ 필요한 군대라도 모아 다르다넬레스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대가로 하산 아가는 부유한 아이든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후일 셀림 3세는 개인적으로 그 가문이 원하지 않는 관직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차파노을루도 같은 보장을 얻어냈다. 이러한 사례는 중앙정부와 호족이 단순한 후원자나 신하가 아니라 동업자였으며, 협상을 통해 상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했다.

수평적 협상에서 커뮤니티들은 제3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중앙정부가 아얀 직위를 공식화하게 되자 커뮤니티의 역할은 얼마간 제한되었지만, 관행이 완전히 막히진 않았다. 오스만 파즈반토을루가 1806년에 사망하자, 비딘에 소집된 커뮤니티에서는 오스만의 무리들에게 도시를 떠나면 후계자를 선출하는 협상을 시작하겠다 통보했다. 그러나 결론이 나기 전에 오스만의 회계사 몰라 이드리스가 비딘으로 입성해 커뮤니티에게 제국 태수로의 임명을 청원해달라고 ‘설득했다.’ 이러한 행동은 국가와 지방호족, 지방신민들 사이에서 조화와 협조가 확인되었다.

아마 이러한 협조의 가장 공식적이고 진보된 형태는 조세징수도급 분야였다. 제국이 비혹 상인들과 경제적 협력을 맺기는 했으나, 말리카네 체계는 장기적으로 행정적 특혜의 새로운 요소를 더해줬다. 청부업자들은 종신 계약을 통해 수취 단위를 확보하면서, 사법권도 장악하였다. 법관을 제외한 다른 관리가 해당 지역에 개입할 수 없다는 면제serbestiyet 원칙에 따라, 말리카네보유자는 담당 지역과 그 커뮤니티에 대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요즈가트를 기반으로 활동한 차파노을루가 최고의 예이다. 1790년대에, 셀림 3세의 조언가 타타르즉 압둘라 아가Tatarcık Abdullah Ağa는 문벌세력이 불만으로 가진 바를 목소리 높였다.

태수가 말리카네 지역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지역 유지들이나 호족들이 [이 지역 내부에] 권세를 떨친다. 그들은 신민들을 괴롭힌다. 그들 대부분은 불충하고 반항을 일삼는다.

정치적 동맹, 이익과 복종에 대한 협상, 계약을 통한 협력이 오스만 지방 체제의 근간이 되어가는 만큼이나 이러한 협력에 동의하지 않는 파당의 반발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분쟁 역시 협상의 부분이었다. 오스만 역사에서 제국에 도전했던 문벌가문이나 지방 태수들은 반란군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카렌 바르키Karan Barkey가 17세기의 경우를 들어 보였듯, 반란은 극단적으로 한 길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협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언제나 오스만 국가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거나, 이스탄불 지배 엘리트들의 변동에 따라 정책이 변홯여 반란군은 용서받을, 심지어, 관직을 제수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18세기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오스만 파즈반토을루로, 1795년, 1797년 ~ 1800년, 1802년 ~ 1803년에 다뉴브 불가리아와 왈라키아 지역에서 3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파즈반토을루의 본래 의도는 호족으로써 합법적으로 태수로 임명되는 것이었지만, 그의 도전은 셀림 3세의 개혁에 대한 사회적 불안을 동력으로 성장했다. 또한 국제적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 파즈반토을루가 결국에는 제국에서 독립하여 발칸 반도에 작은 왕국을 세우고자 했는지, 프랑스의 문서대로 이스탄불에 존재한 동맹, 크림칸국의 기라이왕조의 왕자, 메흐메드 젱기즈 기라이Mehmed Cengiz Giray와 협조하여 친프랑스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결국 파즈반토을루와 오스만국가는 파즈반토을루를 비딘 태수로 임명하는 한편 아다나 지방의 세금도 얹어주는 것으로 협상했기 때문이다.

파즈반토을루의 사례는 이 시기 제국의 몇몇 호족들이 오스만국가와 나폴레옹 시대 유럽 국가들 사이를 오가는 국제적 인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스탄불의 국가와는 관계 없이 잔니나의 알리 파샤는 영국과, 알렘다르 무스타파는 러시아와, 파즈반토을루는 프랑스와 독자적으로 동맹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행동이 오스만 세계로부터의 분명한 독립을 계획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는 제국으로부터 거의 독립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우산 아래에 남기를 선호했다.

이 호족들이 이데올로기적(또는 종교-정치적)인 동기가 있었는가 아니면 그저 세력을 키우고 싶었을 뿐이었나? 어떤 호족들은 당장에 가진 지역적 이익을 넘어서서 제국 정치 전체에 대한 의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셀림 3세가 신군대 양성과 새로운 재무행정 체계 도입을 통한 자원에 대한 직접 통제를 포함한 신질서 개혁을 추진할 때가 이 예이다. 이는 오스만 사회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저항을 불러왔다. 예니체리, 교육층, 민중들은 대놓고든 은밀하게든 옛 질서와 종교, 이익을 위협하는 신질서 개혁에 반대했다. 몇몇 호족들은 이 반대파에 영합했다. 파즈반토을루의 봉기는 지방호족의 도전에서 이스탄불의 엘리트들이 이끄는 신질서의 ‘폭정’에 대한 대중적 저항으로 변화했다. 표면적으로는 셀림을 지지했던 루세의 이스마일은 1806년에 지방 커뮤니티들을 규합하여 인기가 없던 신군대가 트라키아로 파견되는데 중요한 저항을 조직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두 거대 호족 가문 차파노을루와 카라오스마노을루는  신질서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며, 아나톨리아의 젊은 청년들을 모아 신군대로 편성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신질서와 관련된 지방유지들과 벡타시나 낙시벤디 종단의 정치적 입장 또는 알바니아나 보스니아 등 민족적 네트워크 간의 연계성은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호족들이 제국 정치적 변혁기와 맞물려 최고의 입지에 오른 것은 1808년 가을,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가 중앙의 엘리트들과 함께 이스탄불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셀림 3세를 필두로 하는 개혁파 정권을 복구했던 때이다. 이 쿠데타 세력은 셀림이 암살당하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무스타파 4세를 폐위하고 마흐무드 2세를 세웠으며, 예니체리의 지지를 받는 구법당을 쓸어버렸다. 새로운 대재상 알렘다르 무스타파는 차파노을루나 카라오스마노을루 등 지방 호족 가문이나 세레스의 이스마일 베이 등을 이스탄불로 불러들여 제국 회의를 열었다. 동맹의 맹세Sened-i İttifak라 알려진 이 회의는 제국의 문벌 가문과 지방의 호족들이 모여 작성하고, 술탄의 서명을 받았다. 이 회의는 개혁 의제의 확립하고 새로운 군대의 창설을 의결했다. 또한 이를 통해 지방 호족가문들은 오스만 국가의 합법적인 동반자가 되었고, 공식적으로 부와 지위, 권력,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이 대가로 호족은 개혁의 연속성을 위해 노력하고, 술탄과 제국의 영속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즉, 중앙의 엘리트, 지방의 엘리트들은 술탄의 모두 공식적인 동맹ittifak의 청부인müteahhid가 되었으며, 서로를 보증kefil을 서게 되었다. 그런 반면 이 맹세는 중앙의 문벌가문과 지방의 호족 가문이 제국 속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즉, 수직적이지 않은, 수평적인 관계를 강화했다. 이 맹세는 국가를 술탄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 내외부의 엘리트들이 모두 지분을 가진 것으로 재규정했다. 술탄의 직위는 국가의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으나, 이제 술탄은 더 이상 절대 군주가 아니었다. 술탄은 최고 도급업자supreme contractor가 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압력이 야기한, 오스만제국의 제도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들 가운데, 이것이 가장 급진적이었다. 2개월 뒤,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는 예니체리 반란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의 정권은 붕괴하였으며, 동맹의 맹세는 공식화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결론

이 글은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지방호족들이 어떤 방식으로 제국과 수평적 관계를 맺었고, 협력하고 약속하고 정치적 동맹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평적 관계는 제국의 전통적인 위계 체계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으며, 하향식 명령, 임명 체제와 변해선 안될 충성심에 대한 요구도 계속되었다. 1808년 가을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오스만 술탄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신앙적 믿음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지방 호족들을 도전에도 불구하고 셀림 3세와 마흐무드 2세의 개혁은 근대적인 중앙집권국가와 위계체계를 결국에는 복구하였다. 제국의 관료들─몇몇은 근대교육을 받았었다─은 제국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1820년대까지 수평적 경향과 수직적 경향을 다투었으나, 행정과 군사부문은 근대화가 승리했고, 관료국가에 대한 지방의 도전은 완전히 사라졌다.

1820년 이후로,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가 세운 왕조를 제외하면, 중앙정부에 의해 제압되었다. 말리카네 체제는 제거되었고, 세금도급업자들은 축소되었으며, 제국 태수들과 관료들이 지방 호족들을 대체하고 사병은 해체되었다. 오스만국가는 어떻게 이렇게 성공적이으로 권위를 되찾고 지방 유지들의 권력을 축소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방적으로 커뮤니티의 선출권은 탄지마트 시대(1839년 ~ 1876년)의 시정 개혁과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발칸 반도에서 시작된 민족주의의 확산은 동부 지역으로도 이어졌고, 오스만 정치 문화의 동력을 영영 바꿔버렸다.

그러나 호족의 제거와 군사봉토 권력의 감소도 19세기 오스만 사회정치계의 지방 유력 가문들의 두드러진 역할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몇몇 가문들은 지역의 정치를 장악하고 점차 제국 정계로 진출하여 탄지마트 시대와 입헌시대(1876년 ~ 1878년, 1908년 ~ 1918년)에도 활동했다. 어떤 가문은 상업이나 농업으로 눈길을 돌렸다. 또 다른 가문들은 오스만 관료계와 협조하기도 했다. 오스만제국이 베를린조약(1878년)과 발칸 전쟁(1911년 ~ 1913년)의 사이에 차츰 발칸 지역을 상실할 때, 발칸 반도의 유명 무슬림 가문들은 정치적 역할, 부, 권력을 잃었고, 대개는 아나톨리아로 이주했다. 그러나 알바니아와 아나톨리아, 아랍 세계에서는 제국의 멸망, 심지어 그 이후까지도 이들은 여전히 권세를 누렸다. 1918년과 1925년 사이, 현대 터키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아나톨리아의 지방 엘리트들은 1808년과 마찬가지로 군사-관료계층과 동맹을 맺고, 차츰 초기 터키 공화국의 엘리트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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