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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raman Şakul, “Ottoman perceptions of the military reforms of Tipu Sultan and Şahin Giray,” New Trends in Ottoman Studies. Papers presented at the 20th CIÉPO Symposium, Rethymno, Crete, Greece (27 June – 1 July 2012), M. Sariyannis et. al., University of Crete, Dept. of History and Archaeology – Foundation of Research and Technology-Hellas - Institute for Mediterranean Studies, Rethymno, 2014 [e-pub], pp. 655-62.

초록

오스만사에서 군제 개혁 문제는 아주 민감한 쟁점이었다. 서구식 군제 개혁을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1826년, 이스탄불에서 예니체리들을 모두 학살한 뒤에야 결실을 맺었다. 예니체리 군단 폐지는 유럽식 의복을 입고 유럽식으로 훈련 받은 근대적 군대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스만 군제에 비서구 국가를 어떻게 참고 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까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1825년 그리스 독립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한 메흐메드 알리 파샤의 이집트 무슬림 군대는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이집트 군대가 오스만 개혁파에 영향을 미쳤음은 희미하게나마 인정된다. 최소한 이집트군의 성공은 유럽식 군제의 필요성을 이스탄불 민중들에게 설득했고, 마흐무드 2세는 예니체리 군단을 해체할때 이를 활용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서구식 군제 개혁을 한 최초의 무슬림 집단은 이집트도, 오스만국가도 아니었다. 최초로 서구식 군제 개혁을 실행하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것은 잠시나마 독립을 이룬 크림칸국의 샤힌 기라이Şahin Giray 칸과 마이소르 왕국의 하이데르 알리Hyder Ali와 그 아들 티푸 술탄Tipu Sultan이었다. 따라서, 두 무슬림 국가의 군제 개혁에 대한 오스만인들의 반응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충분할 것이다.

티푸 술탄과 샤힌 기라이의 군제 개혁에 대한 오스만조의 인식

오스만인들은 이 지배자들과 그 업적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오스만국가는 샤힌 기라이를 러시아의 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꼭두각시로 생각하고, 그의 군제 개혁를 타타르인의 러시아화로 간주했다. 반대로 오스만조는 마이소르에서 실현된, 크림칸국의 그것과 같은 군제 개혁은 인정하고, 이스탄불을 방문한 마이소르의 사신에게 대단한 관심을 표했다. 오스만 개혁파는 종교와 전통을 근거로 한 격렬한 비판에 시달렸으나, 이를 샤힌 기라이에게 그대로 써먹었다. 이는 서구화 개혁 문제에 있어 종교나 전통이 현실정치 상황만큼 중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종교와 전통은 개혁에 대한 강력한 언어와 단어들로 비판거리를 제공했으나, 사실 서로 다른 정파들이 사용한 레파토리에 지나지 않았다.

티푸의 가문은 1780년대 영국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명예를 떨쳤는데, 서구화된 군대 덕택이었다. 하이데르 알리(1761년 ~ 1782년)은 남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여 영국의 주요한 상대가 되었다. 심지어 하이데르 알리는 1779년에 말라바르 해안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기까지 했다. 그의 아들 티푸 술탄(페트 알리Feth Ali)는 영국의 견제 정책을 마주했다. 영국을 극복하기 위해 티푸 술탄은 프랑스, 오스만제국, 오만,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 외부 국가와 친교를 맺으려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파견된 것이 굴람 알리 칸Ghulam Ali Khan이 이끄는 사절단으로, 무스카트, 바스라, 바그다드를 거쳐 이스탄불로 갔다. 사절단은 본래 900명이 넘었으나, 바스라에 도착하자 300명 만이 이스탄불로 향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2년에 걸친 여행의 끝인 1787년 9월 25일, 사절단은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티푸는 독립 군주로써의 인정과 군사 원조, 교역 특권을 오스만인들에게서 얻고자 했다. 티푸는 상업의 확대를 위해 인도양의 항구도시 망갈로르Mangalor와 바스라를 교환하자는 제의도 했다. 이외에도 티푸는 오스만조에 군사전문가와 행정전문가를 마이소르에 보내달라 요청하는 한편, 오스만의 아르메니아계 상인들에게는 고품질의 직물을 마이소르에 팔아달라 요청했다. 교섭은 성공을 거뒀다. 압둘하미드 1세는 칼리프로써 티푸를 군주로 인정하고 동전의 발행을 허락했다.

오스만 연대기 가운데 최소 한 종류는 티푸 술탄의 군대를 셀림 3세의 군제 개혁의 모델로 간주하고 있다. 자비Cabi Ömer Efendi의 연대기는 이스탄불을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따라서 그의 기록에 이스탄불 대중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다고 여겨도 된다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황도의 신민들은 인도 사절단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절단이 이스탄불로 온 목적이 오스만조에 대한 군사 원조를 제공하기 위함이라 믿고 있었다. 자비의 서술에 따르면 인도 사절 굴람 알리는 “인도에서 이스탄불로 오는 내내 인도 군인들이 짊어진 가마에 타고 있음으로써 군주의 군대가 얼마나 훈련을 잘 받았는지 보였다.” 페트 알리가 술탄 압둘하미드 1세에게 군대에 대해 자랑한 바에 대해서도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따르면 티푸 술탄은 영국 포로를 교관으로 하여 군대에 화기 전술을 훈련시켰다. 이는 이슬람의 상호주의 원칙mukabele-i bi’l-misl, 즉, 이슬람이 적에게서 지식을 얻는 것을 허락한 덕분이다. 소문은 이스탄불에 온 사절단이 군사 원조를 제의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티푸 술탄은 오스만 군대를 유럽식으로 훈련시켜 러시아를 격파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인도인 연대는 오스만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카으트하네Kağıthane(이스탄불의 군ilçe: 역주)에서 공개 훈련을 가지기도 했다. 압둘하미드 1세는 여기에 큰 인상을 받았지만 예니체리 군단은 이러한 훈련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제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개 훈련은 ‘밤낮으로 [러시아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후계자 셀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자비의 서술은 사실과 확연히 다른 부분이 존재했다. 페트 알리의 편지는 영국에 대한 승리를 자랑하긴 했으나 오스만인들에 대한 군사원조를 제의하는 내용은 없었다. 마이소르인들이 신식 군대를 편성한 방법도 적혀있지 않았다. 티푸의 서구식 무슬림 군대가 정말로 젊은 황자 셀림을 흥분시켰는지도 분명치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페트 알리는 단지 도시 몇개를 교환하자고 제의했을 뿐이다.

1725년 이래로 황자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셀림의 탄생은 상서로운 일로 여겨졌다. 따라서 셀림은 조심스러운 교육을 통해 장래 제국의 구세주가 될 사람으로 키워졌다. 그의 삼촌 압둘하미드 1세(1774년 ~ 1789년)은 당대 톱카프 궁전 문화와 대조되게, 셀림에게 사회활동의 자유를 주었다. 이 자유를 이용해 젊은 왕자는 개혁파가 주인 자신만의 모임을 만들고,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유럽식 국정운영, 제도, 군사 제도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셀림의 자유로운 생활은 1785년, 대재상 할릴 하미드 파샤Halil Hamid Pasha가 압뒬하미드 1세에 대한 반란을 꾸밀때 그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끝이났다. 특기할만한 점은 오스만 역사에서 3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국제조약에 후계자로 이름을 올린 예에 셀림이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이중 협정double treaty’의 첫번째 예는 술탄 무라드 2세와 후계자 메흐메드 2세(정복자)가 함께 서명한 오스만-베네치아 조약(1446년)이다. 이 시기는 헝가리와 세르비아에 의해 발칸반도에서 축출될 위기에 빠진 시기였다. 쉴레이만 대제의 아들 셀림도 오스만-폴란드 조약(1564년)에 서명하여, 연로한 술탄 사후에도 조약이 유지되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셀림 3세의 경우는 앞의 두 경우와는 약간 달랐는데, 셀림 3세가 서명한 조약은 단순한 상업 특혜 조약(카피툴레이션)을 넘어서는 정치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비에 따르면 러시아는 후계자 셀림이 서명한 문서는 러시아의 크림 합병(Aynalıkavak Tenkihnamesi)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연로한 술탄(압뒬하미드 1세)는 쉴레이만과 마찬가지 이유로 이를 요구 받았다.

1789년, 셀림 3세는 삼촌 압뒬하미드 1세를 계승하였다. 셀림의 치세는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사이에서 재앙적인 전쟁의 와중에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잠시간 젊은 술탄에게 평화기가 왔지만 너무 짧았다. 1798년 말,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으로 오스만국가는 또다시 전쟁에 말려들어갔다. 이때 오스만인들은 프랑스에 대항해 영국, 러시아와 협조했다. 1798년 9월 말, 셀림 3세는 다시 한번 페트 알리에게 편지를 썼다. 과거 인도사절단이 방문한지 10여년, 두 무슬림 국가는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인도의 영국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페트 알리와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인도로 원정을 나서기에 앞서 마이소르 왕국의 군사적 지원을 준비하고 싶어했다. 이는 혁명 프랑스에 대항하는 연합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불안감을 영국과 오스만인에게 주었다. 영국의 요청에 따라 셀림 3세는 페트 알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는 일은 정치적 자살행위라고 적었다. 셀림 3세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칼리프로써 이 편지를 적었다. 셀림은 프랑스인들이 이집트를 침략하여 오랜 친교 관계를 얼마나 망쳐버렸는지 증언했다. 배반과 기만이었다. 그는 페트 알리에게 프랑스의 진짜 의도는 인도 정복이라고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이 이교도들’은 세계의 무슬림 전부를 무릎꿀리고 무함마드의 종교와 그 국가들을 지구에서 없애려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어떤 약속을 하건 간에 국제법의 파괴, 약탈, 학살만이 그들의 발자국으로 남았다. 프랑스의 새로운 행정부는 모든 종파, 종교, 신, 선지자를 부인하는 절대적인 자유에 근거했고, 세상 모든 왕정을 폐지하려 들었다. 이 프랑스 ‘강도, 거짓말쟁이’들은 심지어 교황마저도 짓밟으며 사제들을 죽여댔다. 셀림은 베네치아의 예도 들었다. 사실 베네치아인들도 공화국이란 면에서 ‘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베네치아는 프랑스에 최소 중립이나 친근감을 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 ‘도적떼’는 그 중립적 지위를 인정치 않고 베네치아 공화국을 정복했다. 베네치아는 교황 이상으로 프랑스에게 당해, 아주 정치적 독립체의 지위를 상실해버렸다. 페트 알리에게 유럽 군주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프랑스의 ‘악행’을 상기시킨 셀림은 ‘무슬림’들을 코르푸와 이오니아 군도로 보내 프랑스로부터 옛 베네치아 영토를 정복하고, 그곳의 프랑스 장교 모두를 포로로 잡았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셀림 3세는 다시 한번 페트 알리에게 친프랑스적 외교정책을 수정하라는 결론으로 편지를 끝냈다. 티푸 술탄이 영국에 아쉬운 점이 무엇이건 간에 오스만제국을 통해 교섭하면, 셀림 그 자신이 칼리프로써 중재하겠다고 제의했다.

오스만조의 군제 개혁에 참고가 된 또 다른 무슬림 모델, 크림반도의 샤힌 기라이가 주도한 개혁은 사실 이스탄불의 증오를 한몸에 받았다. 샤힌 기라이는 베네치아에서 몇년 간 살았었고, 유럽의 정치 문화에도 익숙했다. 1777년에 권좌에 오른 샤힌 기라이는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크림칸국을 유럽식 독립 국가로 만들기를 꿈꿨다. 샤힌은 근위병 베쉴리beşli를 유럽식 크림 군대의 중핵으로 삼고자 했다. 20,000명 규모의 군대는 1,000명의 베쉴리와 2,000명의 섹반sekban을 포하말 것이었다. 크림반도에 파견된 러시아의 관리 프로조로프스키Prozorovskii는 이에 대해 허무맹랑한 계획이라 비판했다. 샤힌은 우선 800명의 베쉴리로 시작하여 매 5개 가구마다 1명의 군인을 징집했다. 군마와 무장 또한 이 가구들이 공급할 것이었다. 샤힌 기라이는 군대에 유럽식 군복을 입히고 러시아식으로 훈련시켰다. 군대의 계급도 러시아식을 따왔다. 또한 샤힌 기라이는 크림반도의 무슬림과 기독교도를 뒤섞어 정규군을 편성했다. 이는 이스탄불의 크림인들에게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왔다. 샤힌은 20,000명 규모의 군대를 갖추는데는 실패했지만, 정예 베쉴리 부대의 규모는 1,000명을 갖추고 1781년에 폴란드를 통해 30문의 대포를 갖췄었다.

샤힌의 친러시아적 행보 때문에 오스만정부는 1779년까지 그를 크림반도의 칸으로 임명하기를 거부했다. 또한 샤힌의 광범위한 서구식 개혁은 크림반도에 대립을 야기했다. 1782년, 샤힌 기라이는 결국 크림칸국을 떠나 러시아로 망명갈 수 밖에 없였다. 러시아 대사는 세이쉴퀴탑Reisü’l-küttab(Reis Efendi) 엘세이드 메흐메드 하이리 에펜디Es-Seyyid Mehmed Hayri Efendi와의 대담에서 크림반도의 군제 개혁 때문에 샤힌 기라이가 쫓겨난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스 에펜디는 무슬림 군대에 러시아 장교를 고용하고, 러시아식 의복을 입혔다는 이유로 이를 정당화하려 시도했다. 그러자 러시아 대사는 드 토트 남작Baron de Tott과 그의 부하들이 오스만해군에 고용되어 1770년대에 활동한 것을 상기시켰다. 이에 당황한 레이스 에펜디는 그들은 독야드에 갖힌 ‘포로’였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교관들을 신식 군대에 고용해야 한다는 샤힌 기라이의 고집은 미증유의 일이긴 했다. 그의 서구식 군제 개혁은 여러 차례 격렬한 비난을 야기했다. 예를 들어, 크림반도를 떠난 이후 샤힌이 타만 지방을 방문했을때, 벤데르의 지휘관 에부베키르 파샤Ebubekir Paşa는 이를 질책하고 유럽식 의복은 벗어버리라고 권했다.

사가 와스프Vasıf는 샤힌 기라이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 샤힌은 종교 자선 재단을 몰수하고, 이슬람의 규약을 저버렸으며, ‘전통과 합리성 모두 저버린’ 새로운 세금을 거뒀으며, 섹반으로 무슬림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프랑크식’ 의복을 강요했다. 그러면서도 와스프는 새로운 세금을 만들고, 서구 군복의 새 군대를 편성한 셀림 3세의 개혁을 지지했다. 그러나 와스프는 셀림의 개혁에 대해서는 ‘전통과 합리성 모두 저버렸다’는 평가를 하지 않았다. 샤힌 기라이에 대한 와스프의 평가는 개혁파당 역시 정치공학에 따라 반대파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카테리나 2세는 샤힌 기라이를 1784년부터 1787년까지 보로네츠Voronetz에 유폐했다. 1787년, 샤힌은 오스만제국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때 오스만제국의 변경에서는 샤힌 기라이가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보그단Bogdan의 군주가 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몰다비아의 대공이 샤힌 기라이가 ‘프랑크식’ 의복을 입은 초상화를 보자 이 의혹은 더 강해졌다. 술탄 압뒬하미드 1세가 이 그림을 보고는 소리쳤다. “완전히 기독교도로구만! 기독교로 개종한게 분명해! 신께서 이 이교도를 벌하시길!” 페이줄라 에펜디Feyzullah Efendi의 기록은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술탄이 군대에 정규적인 훈련을 재도입하려 하자, 1808년, 예니체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구식 군복을 입은 근위병단과의 시가전은 며칠에 걸쳐 계속되었고, 이스탄불은 전장이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예니체리들은 어떤 개혁이든 지지하겠다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들은 술탄이 요구하는 서구식 군복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페이줄라에 따르면, 유럽식 복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대에 정체성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반란군의 종교적 신념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교도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결론적으로,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 티푸 술탄으로부터 배우기도 힘들었고, 샤힌 기라이의 개혁을 지지하기도 힘들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스탄불의 무슬림들은 다른 무슬림 국가들에서 진행된 서구신 군제 개혁에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인도의 개혁은 찬양을 받은데 반해 샤힌 기라이의 개혁은 인도의 것과 목표와 수단이 모두 비슷했음에도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오스만 위정자들 역시 유럽식 군복 채용에 혼란스러운 반응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필요에 따라 종교적 상징을 이용해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는 군제 개혁이 순수한 군사적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치적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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