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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 Nur Yıldız, “Manuel Komnenos Mavrozomes and  His Descendants at the Seljuk Court:  The Formation of a Christian Seljuk-Komnenian Elite,” Crossroads between Latin Europe and the Near East: Corollaries of the Frankish Presence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12th - 14th centuries), Stefan Leder, ed., Würzburg: Ergon Verlag, 2011, pp. 55-77.

셀주크 궁정의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와 후예들: 기독교도 셀주크-콤네노스 엘리트의 형성

케이스 호프우드Keith Hopwood에 따르면, ‘엘리트 상호 작용은 변경 지대에서 오랜 기간 비잔틴 문화와 튀르크 문화 사이에서 일어났다.’ 호프우드는 변경 지대가 아주 다른 기원과 정체성을 가진 두 문화체가 섞이고 상호 작용한 공간이었다고 덕붙였다. 그러나 비잔틴-셀주크 엘리트 상호 작용은 변경 지대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셀주크 군주들은 망명 비잔틴 귀족들이 황가의 일원이자 가신으로써 셀주크 권력층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겼다. 1204년 라틴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Manuel Komnenos Mavrozomes 같은 비잔틴 귀족들은 셀주크 영토에서 엘리트로써의 삶을 이어갈 귀한 기회를 찾았다. 비잔틴 사료와 셀주크 사료를 기반으로 하여 이 논문은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가 기야스알딘 카이후스로 1세(1192년 ~ 1196년; 1205년 ~ 1211년)의 재집권을 도운 이후 마브로조메스 씨족이 셀주크 엘리트 최상위층으로 합류하는 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더나아가, 마브로조메스의 ‘셀주크화된’ 콤네노스 후예들이 13세기 비잔티움의 세계 속의 셀주크 정치체를 결속하는 상징적인 전략적 존재가 되었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비잔틴연구자의 시각: 변경의 반역자 마브로조메스

4차 십자군을 전후로 하여 아나톨리아의 지방 분열주의provincial separatism에 대한 연구는 이미 많다. 아크로폴리테스Akropolites는 라틴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인한 혼란이 독립 군주, 즉 프로이콘테스proichontes의 출연의 기반이 된 주요인으로 여겼다. 프로이콘테스에 대해 아크로폴리테스는 “스스로의 주도로 또는 ‘그 주민들이 땅을 지키기 위해 추대하여’ 권좌에 오른 이”라고 덕붙였다. 아크로폴리테스가 지적하였듯, 이런 군주들은 지방에 가문의 이권을 가지고 있거나 지방 관직을 맡고 있었는데, 후자의 경우 대개 군사적 관직이었다. 또한 이 현상은 사실 이로부터 10몇년 전인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죽은 1181년부터 차츰 시작되었다. 비잔틴연구자들은, 비잔틴 귀족 중 여럿이 비잔틴 정부의 쇠퇴 이후 서부 소아시아에서 독립 군주가 되었으나,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가 이 용어에 딱 들어맞는 이로 보았다. 앞서 설명한 견해에서 마브로조메스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가 셀주크 권력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주 또는 반역자로써 비잔틴의 유산을 두고 친척인 라스카리스 가문과 경쟁했다는 점에서 나온다. 호프우드는 마누엘 마브로조메스를 14세기 비잔틴-터키 변경 지역에서 독립체로 출연하여 소국을 형성한 터키인 군벌bey의 13세기 비잔틴적 대응자 또는 원조라 설명했다. 터키인들의 예로는 멘테셰 가문, 아이든 가문, 오스만 가문의 공국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호프우드에 따르면 마브로조메스의 예는 “변경 지대가 개인적으로 다른 주요 군주들과 충성/보호 관계를 형성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떠받드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마브로조메스는 1204년 이후 셀주크 세력 아래로 들어가, 비잔틴 정체성과 기독교도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스스로를 셀주크 엘리트로 재정의했다. 이들은 콤네노스의 후예라는 사실을 셀주크 영토 내에서도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다.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는 상당히 눈에 띄는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브로조메스(검은 죽) 가문의 후예였는데, 이 가문은 12세기 펠로폰네소스의 명망가였던 것으로 보이며, 콤네노스 정권의 가장 중심부에 있었다. 1170년대에 그의 아버지 테오도로스Theodore는 마누엘 1세 콤네노스(1143년 ~ 1181년)의 제일가는 장군이었고, 황제의 총애 덕분에 마누엘과 그의 아내 테오도라 바타치나Theodora Vatatzina 사이에서 난 딸(이름은 전해지지 않음)과 결혼하여 부마 즉, 감브로스gambros의 지위를 얻기까지 했다. 테오도레 마브로조메스는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1183년 ~ 1185년)의 휘하에서 잠시나마 총리의 직위로도 활동하였다. 마누엘 1세와 안드로니코스 1세 정권에서 아버지의 높은 지위와 콤네노스 가문과 바타체스 가문과 모계로 이어진 혈통 덕분에, 마누엘 마브로조메스는 비잔티움 귀족 사회의 최고가는 계층에 속하게 되었다. 당대의 관습에 따라 마누엘은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외손자로써 콤네노스 성씨도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

장군이자 부마로써 제국의 중심부에 있었던 아버지와 달리 마브로조메스가 비잔틴 국가 내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마브로조메스가 1185년 이후 앙겔로스 가문의 발흥 때문에 스스로 제국의 중심지에서 멀어진 것은 확실해보인다. 이븐 비비Ibn Bībī의 기록에 따르면 셀주크 술탄 카이호스로 1세의 방문 시기에 가문의 영지로 은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앙 정부와 먼 곳에 물러나 있던 초기 경력이 사료상에서 잘 관찰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마브로조메스는 소아시아의 주요 사건들에 주요 인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코니아테스Choniates에 따르면, 마브로조메스는 마에안데르 계곡에서 폐위된 황제 알렉시오스 2세 앙겔로스(1195년 ~ 1203년)의 부마, 1205년 니카이아의 비잔틴망명정부의 초대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의 경쟁자로써 등장했다. 테오도로스 1세는 1205년에 마브로조메스를 격파하고, 이후 니카이아에서 황제로 선출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마브로조메스와 화약을 맺고 그 대가로 직전에 카이호스로 1세가 점거한 국경 지대의 성채 코나이Chonae와 라오디케아Laodicea의 점유를 인정해줬다.

코니아테스가 묘사하는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의 활동을 추적할 주된 사료는 코니아테스와 이븐 비비의 저작이다. 그러나 두 사료가 일치하는 바가 상당히 적다. 비잔틴연구자들은 코니아테스의 저작이 당대인의 사료이며, 마누엘 마브로조메스와 셀주크조 사이의 관계를 추적할 가장 믿음직스런 출처라 생각한다. 반면 셀주크사 연구자들은 이븐 비비의 서술에 좀 더 의존한다. 두 연구분야는 때때로 서로 전혀 관계없니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단순히 남은 사료들을 취합하여 매끄럽게 사건들만을 나열하기 보다는, 두 개의 서로 맞지 않는 서술들을 비교하여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총체적 의견을 나타내보자 한다.

코니아테스의 사서에 나타난 마브로조메스 상은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서술하는 와중에 형성된 것이었다. 『역사Historia』에서 이 서술은 콤네노스 가문과 그 후계자 황제들의 죄악을 추적하여 완성되었다. 이 저작은 1204년의 재앙으로 인한 제국의 붕괴와 1206년 ~ 1207년에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의 출연으로 끝이났다. 코니아테스가 최종적으로 사서의 서술을 완료한 것은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가 1211년, 마이안데르 강의 안티오케이아에서 카이호스로 1세를 격파한 이후 언제인가이다. 이 승리로 라스카리스는 장인, 알렉시오스 3세를 복위시키려는 셀주크 술탄의 야망을 끝장냈다. 라스카리스가 장인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라스카리스는 신의 은덕으로 말미암아 술탄과 일기토를 벌여 죽이고 셀주크인들을 격파하여, 집권이 신의 의지라는 의미를 가미했다. 라스카리스 가문의 제위 장악은 이전에 많은 의문을 낳았으나, 코니아테스는 마브로조메스의 경력을 이와 함께 서술하며, 전투의 승리를 통해 신의 뜻은 라스카리스 가문에 있음을 강조했다. 코니아테스는 또한 반콤네노스적 레토릭을 마브로조메스를 통해 표현했다. 코니아테스는 다비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형제와 더불어, 마브로조메스를 소아시아에 출연한 테오도로스의 비합법적 경쟁자로 묘사하였다. 코니아테스는 비잔틴 아나톨리아의 분열의 원인을 이자들의 ‘타락’ 때문이라 주장하며, 근시안적 야심으로 신민들의 선의를 무시하고, 친족의 우애를 망친 이들로 몰아갔다. “다시 한번 머리가 세개 난, 멍청한 괴물, 다두정Polyarchy이 동방을 휩쓸었다.” 마브로조메스는 따라서 콤네노스 군주들이 낳은 비잔틴을 괴롭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였을 따름이다.
“제국을 파괴한 원흉은 콤네노스 가문이다. 이들의 야망과 반란으로 말미암아 그녀[제국]은 지방, 도시 마침내는 그녀 자신마저 내준 것이다. 이 콤네노이가 로마인들에게 적대적인 바바리아 국가들 속으로 가서 조국을 파멸시키고, 우리 공공의 업무를 언제고 탈취하고 장악하려했으니 가장 무능하고 멍청한 이들이다.”
코니아테스는 콤네노이Komnenoi란 말을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와 같이 콤네노스 가문의 카리스마를 이용하려 한, 모계로 콤네노스 가문을 이은 귀족들에게도 사용하여 폭넓게 정의했다. “황제는 부계 성씨 앙겔로스 대신 콤네노스를 선택하였는데, 이는 축복받은 콤네노스의 이름과 비교하여 존경 받지 못한 전임자 때문이거나 형의 성이 형과 함께 사라지기를 기원했거나 둘 다였다.” 코니아테스는 동시대의 독자들이 마브로조메스가 외가로 콤네노스의 후예였음을 의식하리라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코니아테스는 황제가 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마브로조메스를 파멸의 가져온 콤네노이의 전형으로 보았다. 그가 투르크인들과 공조하여 비잔틴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었음은 확실했다. 마브로조메스는 전형적인 콤네노이로써 ‘로마인들에게 적대적인 바바리아 국가들 속으로’가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음은 카이호스로 1세와의 친밀한 관계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마브로조메스는 ‘카이호스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딸을 술탄에게 신부로 바쳤다. 또한 콤네노이의 전형 답게 터키의 지ㅝㄴ을 받아 야심을 이루려 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브로조메스는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에 맞설만큼 강해지지 못햇다. 1205년 여름의 어느날, 라스카리스는 마브로조메스를 극복하고 소아시아의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븐 비비의 카이휘스레브 1세와 마브로조메스 사가

마이안데르 계곡에서 마브로조메스의 활동에 대해서는 코니아테스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이븐 비비의 책에서는 전혀 다르다. 사실 이븐 비비는 전혀 다른 관점의 상을 전해주는데, 케이휘스레브 1세는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의 원정 시점부터 마브로조메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1196년 형인 루큰알딘 쉴레이만샤(1196년 ~ 1204년)에 의해 폐위 당한 이후 케이휘스레브 1세는 이웃 지배자들을 찾아다니며 복위를 위한 도움을 구걸했었다. 이븐 비비는 비잔틴 황제(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로 추측된다)가 셀주크 술탄에게 망명을 허락하고 막대한 부maghnam-i buzurg를 하사했다고 한다. 황제는 술탄을 망명중인 물라짐mulāzim(젊은 조신) 하바스khavāṣṣ(총신) 하지브ḥujjāb(시종장; 대개 술탄의 굴람이었음)으로 대우했다.

매저녁 비잔틴 황제는 케이휘스레브 1세와 그의 일행들에게 연회를 베풀었고 이런 분위기 아래서 양자간의 친밀감은 커져만 갔다. 기독교도 황제는 심지어 궁정에서 종교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종교와 믿음이 다름을 우리의 진실한 우정과 동맹, 연합의 장애물으로 여기지 말라.”

비잔틴궁정은 라틴인들과 분쟁 중이었기에 술탄의 황도 체류도 곧 끝이 났다. 이븐 비비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케이휘스레브는 그 자신과 황제를 모욕하는 어느 기사에게 주먹을 날리는 바람에 프랑크인들과 분쟁을 겪게 되었다. 이후 하찮은 라틴인의 모욕을 견뎌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황제에게 한탄하며, 말리크샤로 이어지는 고귀한 셀주크 가문의 일원으로써, 케이휘스레브는 복수를 요구했다. 케이휘스레브는 프랑크인에게 1대1 결투를 청했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케이휘스레브는 온 도시 사람들 앞에서 라틴 기사와의 결투에서 승리했다. 이븐 비비는 술탄과 기사의 결투를 마치 영웅 서사시와 같이 산문과 운문을 예술적으로 섞어 묘사했는데, 아마 셀주크 궁정을 떠돌아 다닌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케이휘스레브의 승리에는 대가가 있었다. 황제는 결투 직후 술탄에게 프랑크인들이 복수하기 전에 황도를 떠나라고 촉구했다. 황제는 마브로조메스가 ‘룸 황제의 후예인 귀족 태생으로 정직하고 너그럽기로는 더한 이가 없는’ 사람이니 그를 찾아가라 추천했다. 케이휘스레브는 수행원들과 가족을 이끌고 마브로조메스의 영지인 섬─이븐 비비의 묘사에 따르면 에덴의 정원을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갔다. 라틴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거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으나, 이븐 비비는 라틴인들에 대해 비잔틴 황제가 복종이나 존중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음을 보이고 있다. 그는 비잔틴의 화려한 옥좌를 차지하고 있어지만, 황제의 지위와 무능은 이븐 비비의 저술에서 술탄의 마브로조메스에게로 보냈음을 보여준다.

이븐 비비가 묘사하는 비잔틴에서의 케이휘스레브의 모험은 마브로조메스의 영지에서 술탄의 옛 시종장, 순례자로 변장한 하지브 자카리야Ḥājib Zakariyyā와 만나면서 끝이난다. 하지지브 자카리야는 술탄에게 형제의 죽음과 조카 이즈알딘 클르츠 아르슬란 3세ʿIzz al-Dīn Qılıç Arslan III의 즉위를 전하는데, 아크로폴리테스의 저술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인물이 보인다(그러나 마브로조메스의 영지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아크로폴리테스에 따르면 알렉시오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난 술탄에게 어떤 이가 비밀리에 접근하여 형제의 죽음을 보고했다. “그리고 이아타티네스Iathatines는 넝마를 걸치고 그 남자와 함께 귀환하여 추종자들을 모았고, 페르시아인들의 군주로 옹립되었다.”

이븐 비비에 따르면 하집 카자리야는 셀주크의 말리크 알우마라malik alumarāʾ, 즉 대장군 무자파르알딘 마흐무드 이븐 야그바산Muẓaffar al-Dīn Maḥmūd b. Yaghıbasan의 명령을 받아 술탄에게 타아후드나마taʿahhudnāmah(충성의 편지)를 전하여 루큰알딘의 어린 아들 이즈알딘 클르츠 아르슬란 3세의 옥좌로 케이휘스레브의 아버지가 1180년 ~ 1182년 사이에 점령하여 그에게 분봉한 울루보를루Uluborlu(Sozopolis, Burghulu)의 귀족들과 함께 귀환하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내졌었다. 그러나 케이휘스레브는 귀환하여 강력한 변경의 수령인 야그바산의 아들들인 무자파르알딘 마흐무드와 그의 형제 자히르알딘 일리Ẓāhir al-Dīn İli와 바드르알딘 유수프Badr al-Dīn Yūsuf의 지원을 받아 귀환하는 것을 꺼렸다. 이븐 비비는 무자파르알딘 마흐무드는 태수sarvar, 군지휘관sarlashgar, 행정관료farmanravā, 아미르umarāʾ들을 호령하는 변경vilāyāt-i ūj의 군주malik로 묘사했다.

케이휘스레브가 귀환을 결심하자 마브로조메스는 비잔틴의 영지를 버리고 술탄에게 동행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븐 비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인근 지역의 점령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마브로조메스는 라스카리스나 라틴인들에게 영지를 빼앗기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마브로조메스는 딸을 술탄과 결혼시키고 아들들을 술탄의 수행원으로 제공했다. 일행은 코냐를 향해 떠났으나 니카이아에서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이들을 억류하여 케이휘스레브가 코냐로 귀환하여 자신과 조약을 맺은 이즈알딘 클르츠 아르슬란 3세의 술탄위를 찬탈하지 않게끔 한 것이다. 며칠 간의 협상을 통해 케이휘스레브는 라스카리스와 거래를 했다. 케이휘스레브를 셀주크 영토로 보내준다면 근래에 셀주크인들이 빼앗은 코나이Chonai(Honas, Khunas)와 라딕Ladik(Denizli)에서부터 코냐까지의 땅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 모든 성채와 토지가 확실히 넘겨질때까지 술탄은 자카리야를 보호자로 한 자신의 아들들을 포로로 황제의 손에 인질로 두겠다고 약속했다. 술탄은 마브로조메스와 함께 영토의 이전을 위해 셀주크 영토로 진입했다. 하지브 자카리야는 교활하게 술탄의 명령을 행했다. 능란하게 룸의 5가지 언어로 ‘감언이설을 내뱉아’ 자카리야는 라스카리스를 속이고 그의 부하들을 매수하여 왕자들을 모두 탈출시킨 것이다. 그는 술탄에게 왕자들이 모두 탈출했으니 성채와 영토를 비잔틴 황제에게 넘길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케이휘스레브는 이 소식을 듣고는 곧장 코냐로 향했다. 옥좌를 차지한 술탄은 마브로조메스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그의 친척들과 동료들에게 고위 관직을 내렸다. 이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이븐 비비의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에 대한 서술은 끝이난다.

코니아테스와 이븐 비비의 차이는 카이후스로 1세와 마브로조메스가 최초로 접촉한 것이 언제인가를 중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븐 비비는 카이후스로 1세와 마브로조메스의 만남을 술탄이 알렉시오스 3세의 궁정으로 망명하여 프랑크 기사들과 갈등을 빚고 있던 시절로 서술한데 반해 코니아테스는 이 시점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사실 코니아테스는 망명중인 셀주크 술탄이 알렉시오스 3세의 궁정을 찾아 왔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코니아테스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은 비잔틴 반역자라는 평범한 주제topos에 따라, 마브로조메스가 변경에서 셀주크조에 접급했으리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 술탄이 알렉시오스 3세에게 의탁한 것을 의뭉스럽게 넘긴데 반해 코니아테스는 1197년에 술탄이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와의 평화 협정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남겼다. 사실 카이후스로의 부재 시기에 그의 형, 루큰알딘 술레이만샤가 코냐를 장악했다. 그러나 코니아테스는 카이후스로가 기대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카이후스로의 희망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기대한바와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중략) 형제에 대항해 복위하려는데에 대한 지원을 찾을 수 없었다.
코니아테스가 1203년 경에 비해 1196년 경의, 카이후스로 1세와 비잔틴 황제의 관계가 덜 친근한 모습을 보여줌은 아마 저자가 비잔틴과 무슬림의 동맹에 대해 가지고 있던 뿌리 깊은 반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코니아테스가 알렉시오스 3세의 궁정에서 대 로고테테스logothétēs나 서기로써 봉사하여 당대 정세에 익숙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침묵은 더 의뭉스럽다.

반면 아크로폴리테스는 이븐 비비의 서술과 동일한 부분이 존재하는데, 그 역시 카이후스로 1세가 비잔틴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적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황제가 셀주크 술탄을 대자godson로 세례받게끔 했다는 이븐 비비의 서술에 나오지 않는 세세한 사항을 덧붙였다. 그러나 아크로폴리테스는 카이후스로 1세와 관련하여 마브로조메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알렉시오스 3세와 함께 술탄이 1203년 9월 도시에서 도주하여 영지로 돌아갔다 주장했다. 따라서 이븐 비비의 서술은 마브로조메스와 카이후스로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유일한 사료로, 여기서 마브로조메스는 라틴인들에 의해 알렉시오스 3세의 힘이 거세된 이후 셀주크 술탄을 후원했다. 그럼에도 이븐 비비가 전하는 마브로조메스는 돋보이지 않는 인물로, 그의 역할은 내러티브 상의 영웅, 셀주크 왕조의 영광을 실현하는 카이후스로 1세의 사이드킥이다. 여기서 카이후스로 1세는 비잔틴이 몰락하는데 반해 적들을 격파하고 승리한다. 몰락한 비잔틴의 대귀족 마브로조메스는 셀주크조 휘하로 들어감으로써 카이후스로 1세의 아래서 부상하는 셀주크 가문의 모습을 확실히 전해준다.

이븐 비비가 보여주는 셀주크 궁정에서의 마브로조메스의 높은 지위는 친밀감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븐 비비 역시 마브로조메스가 셀주크 궁정에서 한 활동에 대해서 상세히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코니아테스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코니아테스는 라스카리스가 카이후스로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은 이후 술탄이 코나이, 라디오카이아 등의 영토와 ‘마이안데르를 따라 바다까지의 땅’을 장인의 ‘영지로 인정’했다. 조약은 1205년 2월, 술탄이 코냐에서 복위한 그 해에 공식화되었을 것이다. 코니아테스는 1205년의 언젠가 카이후스로 1세가 마브로조메스을 변경의 장군으로 임명했고, 마브로조메스는 ‘황제가 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음모를 저질렀’으며, ‘튀르크인들과 함께 마이안데르 강을 따라 진군하며 파괴를 일삼았다.’ 그러나 1205년 여름, 코니아테스는 라스카리스가 전투를 통해 마브로조메스와 그의 튀르크 군대를 격파했다고 전한다. 마이안데르 하류에 비잔틴의 통제가 재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라디오케이아와 코나이는 계속 셀주크조의 손에 남았다.

그러나 이븐 비비의 서술에는 코니아테스가 전하는, 마브로조메스가 카이후스로 1세의 서부 변경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고, 튀르크인들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황제의 직위를 주장했다는데 대응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마브로조메스의 활동을 추적할 기록도 없다. 1214년 ~ 1214년에 만들어진 금석문에서 확인하는 바는, 마브로조메스나 그의 아들(들)이 아니라, 굴람 태생의 군 지휘관 아사드알딘 아야즈 이븐 압둘라 알실하비Asad al-Dīn Ayāz b. ʿAbd Allāh alShihābī가 코나이의 태수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마브로조메스의 아들(들)이 야그바산의 아들들과 같이 다니쉬만드의 옛 영지의 변경 귀족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 때문에 서부 변경에서 황동했다는 기록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서부 변경의 마브로조메스를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기에 어느 쪽이 옳은지는 영영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셀주크 궁정의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

이븐 비비가 마브로조메스가 셀주크 궁정으로 들어간 이후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마브로조메스와 그의 아들들, 가솔들, 수행원들이 카이후스로가 셀주크 수도에 권력을 재확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셀주크 궁정의 군사, 행정 엘리트 사이에서 권력을 강화했다는 점은 추측이 가능하다. 마브로조메스는 딸을 카이후스로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셀주크 왕가와 마브로조메스 씨는 인척 관계를 맺게되었다. 이븐 비비는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의 아들, ‘아미르 쿰나노스 마프로좀Amīr Kumnanōs Mafruzōm’이 카이후스로 1세의 딸과 결혼했다고 전한다.
“[카이후스로 1세는] 그[아미르 콤네노스]에게 순결한 딸을 주어 결혼하게 하였고dar ḥibāla-yi ḥukm-i tazavvuj, 이로 인해 술탄 가문과 인척관계가 되었다. 기야스알딘 카이후스로가 순교한 이후에도 술탄 이즈알딘 카이카우스와 술탄 알라알딘 카이쿠바드는 그를 존경하고 총애하였다.”
마브로조메스 씨와 셀주크 가문의 혼인은 비잔틴 엘리트들이 14세기 셀주크 제국의 중심부에 통합될 수 있게끔 해주었다.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는 셀주크 세력에 합류하기 이전에 방대한 영지의 소유자다고 묘사되는데, 대단한 규모의 귀족 후원자들과 가신단, 용병을 유지할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 마브로조메스는 가문 전체를 들어 셀주크의 영토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마브로조메스와 셀주크 가문의 결합은 비잔틴의 인재들이 셀주크 궁정과 영토로 공급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군사, 행정적인 고위직을 맡은 마브로조메스 씨는 셀주크왕조의 후원에 권력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왕당파에 속했다. 카이후스로 1세는 오랜 망명 시기로 인해서 굴람이 적었기 때문에, 귀족들을 포섭하고 그들의 가신들을 왕당파로 흡수하는 것은 수도에서 술탄의 권력을 다시 세울때 최우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게다가 코냐에서 십년이 넘게 떠나있었던 카이후스로 1세로써는 과거 술레이만샤나 그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 3세에게 충성했던 수도의 셀주크 엘리트들과의 관계를 새로 시작해야 했다. 야그바산의 아들들과 같이 카이카부스를 지지했던 변경의 군벌들은 코냐의 엘리트가 아니었다. 카이카부스가 코냐로 귀환했을때, 그와 도시의 무슬림 커뮤니티 사이의 관계는, 특히 종교 엘리트층과의 관계는, 긴장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새로 복위한 술탄으로써는 오랜 비잔틴에서의 망명으로 인한 생활 방식이 이슬람에 어긋난다 하여 파트와를 발행하는 대중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무턱대고 처형할 수 없었다. 카이카부스의 위태로운 지위와 도시민들의 반감을 고려할 때, 마브로조메스 씨는 궁정에서 술탄을 지지할 엘리트를 공급해줄 좋은 공급처가 되었을 것이다.

마브로조메스 씨족: 셀주크제국의 기독교도 비잔틴 귀족들

이븐 비비의 기록은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의 운명에 대해서 전해주지는 않지만, 마브로조메스의 아들들이 나중의 셀주크 술탄 알라알딘 카이쿠바드(1220년 ~ 1237년)을 지탱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은 전해준다. 마누엘의 아들 아미르 쿰나노스 마프루좀은 ‘룸 땅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게] 귀족들도 복종하고malik-i muṭāʿ 여러 성채와 추종자aṭbāʿ를 거느린’ 강력한 이였다고 묘사된다. 아쉽게도 이븐 비비는 그가 통치한 임지가 어디였는지, 성채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영지는 어디에 있었는지는 전해주지 않는다. 셀주크 가문의 부마로써, 아미르 쿰나노스는 황가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사실 그는 술탄 알라알딘 카이쿠바드(1220년 ~ 1237년)의 친한 친구로, 젊은 술탄이 즉위할 때 이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민 강력한 아미르, 사이프알딘 아이아바Sayf al-Dīn Ay-aba 차쉬니기르chashnigīr(기미氣味하는 관직: 역주)와 그의 세력에 맞서는데 중심이 되었다. 사이프알딘 아이아바 차쉬니기르를 잔혹히 살해한 아미르 쿰나노스는 베일레르베기beylerbegi로 임명되었다. 무바리드알딘 차블리Mubāriz alDīn Chavlī와 함께 아미르 쿰나노스는 1220년대 중반 소아르메니아에 대한 원정에 종군했다. 그러나 이 원정 이후의 그의 삶에 대해서 이븐 비비는 기록하지 않았다.

1220년 경 코냐의 성벽에 새겨진 아랍어 비문을 스콧 레드포트Scott Redford가 판독하여, 아미르 쿰나노스에 대해 더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비문은 그를 ‘쿰나누스 칼루얀 마프루줌“Kumnanūs Kalūyān Mafruzūm(더 음성학적 수정을 가하면 Komnanōs Kalōyān Mafrozōm),’ 즉 ‘아름다운’ 요안네스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John “the Good” Komnenos Mavrozomes(칼로얀Kalōyān은 그리스어 Kaloiōannēs에서 나온 것으로, ‘아름다운 요안네스’를 의미한다: 역주)라 부르며, 알라알딘 카이쿠바드가 그를 수도의 성벽을 고치는데 임용할 정도로 신뢰했음을 가르쳐준다. 게다가 이 비문에 보이는 요안네스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와 알라알딘 카이쿠바드의 관계는 이븐 비비의 서술과 일치하고 있다. 레드포트는 이 비문의 크기가 다른 아미르들의 건축물에서 나오는 비문에 비해 크기가 너무 크고 그 질 역시 좋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유에 대해 레드포트는 이 비잔틴 귀족이 그정도로 술탄의 총애를 받았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레드포트는 또한 콤네노스란 이름이 눈에 띄는 비문이 코냐의 성벽에 존재했던 것은 ‘의도적으로 우정과 충성을 표시하여’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1180년에 죽은 이후 사라져버린, 가장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던 비잔틴의 왕조의 옛 영광과 셀주크 가문을 연결시키기 위함이었으리라 해석했다.

이 비문 외에도, 아미르 쿰나노스의 정체를 확인할 또 다른 증거는 니으데Niğde 박물관에 보관된 인장으로, 소피 메티비에르Sophie Métivier의 분석에 따르면 요안네스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 즉 아미르 쿰나노스의 것이었다. 메티비에르가 이 인장이 13세기 후반의 물건으로 보기는 하였으나, 요안네스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가 가장 활발히 활동한 카이쿠바드의 치세 초기인 13세기 중반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더 나아보인다. 세례자 요한Saint John Prodromos의 초상이 인장의 한 면에 새겨져 있다. 반대쪽에는 그리스문자로 외가로 콤네노이이고 친가로 마브로조메스인 요안네스의 도장이라 새겨져 있다. ‘친가로 마브로조메스인’이라는 표현은 11세기 마브로조메스 씨족의 한 사람이 사용한 인장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코냐의 성벽에 존재하는 아미르 쿰나노스의  비문은 그와 술탄의 친밀한 관계라는 셀주크적 정체성을 보여준다면, 이 인장은 그의 비잔틴 기독교도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또한 두가지 모두 이븐 비비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그가 콤네노스의 후예임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1297년에 새겨졌다고 하는 대리석관에서 우리는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 가문이 셀주크 국가로 이주한 이래 3, 4세대를 만나게 된다. 이 관은 어린 소년, 포르피로겐니토스Porphyrogennetos의 후예, 자주빛 출생의 황제들의 후예, 요안니스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 공Kyr의 후예이자 요안네스 콤네노스의 아들인 아미르 아르슬란 미카일의 것이었다. 이 비문은 성 카리톤 수도회의 파나기아 스필리옷사 교회 정문에 놓여있었다. 이 교회는 코냐 북서쪽으로 8km에 있던 산지의 기독교 중심지 실라이온Sillaion 외각의 게벨레Gevele 산성이 있던 협곡의 북쪽에 위치했는데, 주로 카타콤으로 쓰였다. 게벨레 산성에 있는 수도원 복합지의 존재는 이 성채가 셀주크조 코냐의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코냐, 게벨레, 알라니야의 성채의 교회들은 셀주크 궁정 가까이에 존재했는데, 셀주크 황가와 궁정에 딸린 기독교도들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카이후스로 1세와 같은 술탄들만이 기독교도 아내나 어머니를 둔 것은 아니었다. 황가의 기독교도들은 기독교도 동포나 성직자, 하인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셀주크 중심지의 성채들에 존재한 교회나 예배실의 존재는 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으나, 교회와 그 신자들이 셀주크 지배 엘리트들과 맺은 관계는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 윌리엄 람제이William Ramsay와 한슬룩F. W. Hasluck 등은 이 현상을 셀주크와 아나톨리아 터키 이슬람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주장했다. 카리톤 수도원이나 동정녀 마리아의 성소, 성 사바나 성 암필로키우스의 성소를 방문한 람제이에 따르면 수도원을 ‘무슬림들마저도 성스러운 곳으로 인식하였다.’ 메블레비 종단의 카리톤 수도원에 대한 기록 역시 유사하다. 카리톤 수도원과 셀주크 엘리트의 관계는 실라이온과 코냐의 관계와 유사하다. 본래 기독교 도시였던 실라리온에 알라알딘 카이쿠바드의 와크프에 속하는 권위있는 지위였음을 알려주는 오스만 시대의 기록도 있다. 13세기 중반에 작성된 와크프증서는 실라리온의 기독교 커뮤니티들이 코냐의 성채에 존재한 술탄과 궁정, 모스크을 위해 해야하는 의무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보이듯, 소위 말하는 초기 터키 아나톨리아 이슬람의 포용력은 사실 셀주크 국가에서 일한 기독교도와 무슬림들 사이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필요성이 결합한 것이다. 레드포트는 카리톤 수도원의 파나기아 스필리옷사 교회가 마브로조메스 가문의 집단 매장지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셀주크 국가의 신하로써 마브로조메스 가문은 셀주크 기독교 사회의 사회정치적 지도자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도이자 셀주크 지배 엘리트의 일원이었던 마브로조메스 가문은 셀주크 국가와 그 아래 기독교 커뮤니티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을까? 안타깝게도 비잔틴 태생의 셀주크 엘리트 가문이 어떤 방식으로 셀주크 무슬림 사회 안에서 기독교도로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역사학자와 미술사학자, 고고학자들이 협력해야 이 문제의 밝혀지지 않은 면모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결론

4차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의 혼란 덕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또는 니카이아 인근의 영지를 잃은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는,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처음에는 마이안데르 강변에 독립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이야기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셀주크 사료나 금석문들은 마브로조메스와 그의 후손들이 비잔틴 정체성과 기독교를 버리지 않은 채로 셀주크의 신하이자 군지휘관으로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마브로조메스 가문은 셀주크-비잔틴 엘리트의 교류를 보여주는 예이다. 비잔틴의 지배층 대부분이 튀르크인에게 동화되었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셀주크인이 된 비잔틴 엘리트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많은 셀주크 술탄들과 왕자들이 비잔틴 공주와 결혼하는 방식으로 셀주크 황실에 비잔틴 엘리트들을 흡수시켰다. 셀주크인들 역시 비잔틴인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를수록 황권에 도움이 되는 귀족을 충원할 필요가 있었다. 외국 왕족을 결혼 등을 통해 끌어들이는 것은 지배자가 맞이할지 모르는 위험에 대응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새로운 귀족이 유입될때, 종교적 기원과 관계 없이, 궁정의 엘리트는 다양해졌고 지배자의 권위가 올라갔다. 이는 중세 지중해 동부 전역에서 관찰되는 바이다.

그러나 13세기 초반 마브로조메스 씨족의 구성원들이 군사, 행정의 고위직에 오른 것은 비잔틴 엘리트의 셀주크 엘리트로의 통합이 심화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마브로조메스 가문이 셀주크 지배 엘리트 최상위층이 되었음에도, 마브로조메스는 비잔틴 기원과 기독교를 버리고 무슬림 셀주크화 되지 않았고, 1297년의 비문이 보여주듯, 기독교도 콤네노스 가문의 후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레 대중들에게 보였다. 1204년 비잔틴 국가의 해체 이후에도 라스카리스 가문과 콤네노스 황가의 계승을 두고 경쟁했듯이. 때문에 코니아테스는 마누엘 콤네노스 마브로조메스와 후예들이 콤네노스의 후예임을 불쾌하게 보았다. 셀주크 가문은 콤네노이 마브로조모이와의 인척 관계 형성을 통해서 옛 비잔틴의 기독교 신민들과 공명하고자 했다. 레드포트가 주장하였듯, 아미르 쿰나노스의 비문은 콤네노스 혈통을 이용하려는 셀주크의 시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교묘하게 콤네노스 가문을 셀주크 가문과 연결시킴으로써 중세 후기 절정에 달했던 콤네노스 시대의 강력한 군사력을 셀주크 군대에서 발견하길 바랐다.

마브로조메스의 경우는 셀주크인이 될 수 있는 문화적 범위가 형성되는 과정과 콤네노스의 유산이 셀주크 체계 내부로 상징적으로 이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1204년 비잔틴제국의 멸망은 콤네노이 마브로조모이를 정치적으로 흡수하여 비잔틴 귀족들의 상징적 수도를 정복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셀주크인들에게 제공하였다. 어쩌면 셀주크 정치 문화는 이전의 인식 이상으로 진지하게 ‘비잔틴화’에 임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비잔틴화’는 셀주크인들이 아나톨리아에 확실히 뿌리내리려는 노력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비잔틴의 정치 문화가 13세기 초반 아나톨리아와 지중해 동부에서 비잔틴 권력이 완전히 파멸을 맞이한 시점에 셀주크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정치체로의 연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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