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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e Fleet, “Tax-Farming in the Early Ottoman State,” The Medieval History Journal, 6 (2), April 2003, pp. 249-58.

초록

대개 조세징수도급tax-farming은 부정적인 용어로 생각되었으나, 초기 오스만국가에서 적용된 경우는 경제 발전에 이익이 된 것 같다. 조세징수도급은 최소 14세기 말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스만 지배자들이 비잔틴 영토에서 이미 운용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인 듯 싶다. 아이든이나 멘테셰 등 터키계 국가들에서는 14세기 초반부터 운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본문

현대 오스만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세금 징수 방법으로써 조세징수 도급tax-farming의 존재가 중앙정부 통제의 실패와 탐욕스러운 징세업자tax-farmer들의 남용, 부패, 신민에 대한 착취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린다 달링Linda Darling의 표현을 빌자면, “조세징수 도급은 그 어떤 세제보다도 몰락을 상징하는 바이다.”

대항해시대와 유럽산 은의 대규모 유입에 따른 가격 혁명 그리고 16세기의 재정 위기에 오스만국가는 조세징수도급을 활용해 대처했다. 일카이 수나르Ilkay Sunar는 이 정책이 당장에는 부족한 자금을 즉시 충당할 수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유용하나 “장기적으로는 신민들에게서 중앙으로 향하는 세금의 흐름에 징세업자들이 간섭함에 따라 세금 기반을 갉아먹는다. (중략) 장기적으로는 (중략) 국가에 손실로 돌아온다.” 레샤트 카사바Reşat Kasaba는 17세기와 19세기에 걸친 조세징수도급의 확장이 관료와 생산자 사이의 직접적 접촉을 방해했다고 보았다. 그 결과 “농민들은 이제 가능한한 빠르게 수익을 올려 빚을 갚고 계약을 갱신하는 것 만을 생각하는 징세업자들의 하청업자들을 마주해야 했다. 징세업자나 그 대리인은 목표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했고, 농민들은 이에 대항하여 보호를 받을 수단이 이제는 없었다.”

18세기에 들어서 중앙정부가 점차 사실상 독립적인 아얀ayan(지방 명사)와 징세업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데 실패하자, 조세징수도급은 오스만의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평가되었다.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자 징세업자들의 세는 더 강해져, 더욱 농민들을 쥐어짰다. “심화되는 재정과 행정의 혼란 아래에서 징세업자들과 그들의 대리인, 하청업자들 그리고 지방징수관들은 행정상의 허점을 발견하고 농민 가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넓혔다.” 19세기가 되자 “국가가 징세업자와 농민들의 사이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그나마도 실효가 없자 농업세가 감소했고,” 조세징수도급은 “자유로운 상품의 흐름을 방해하는 중대한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유럽 상인들은 징세 위탁이 그들의 무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불평하면서도, 부유한 징세권을 구입하였다. 엘레나 프랑가키스시레트Elena Frangakis-Syrett에 따르면, 조세징수도급은, 농업과 교역에 미치는 악영향은 차지하고서라도, “1838년 앵글로-오스만 합의The 1838 Anglo-Turkish Convention(발타 리만 조약Treaty of Balta Liman이라고도 함: 역주)에 직접적이진 않으나 감접적으로 위배되었다.” 19세기의 오스만 역사가 아흐메드 제브데트 파샤Ahmed Cevdet Paşa는 19세기 말 보스니아의 징세업자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동들이나 그 자신이 루멜리의 뮈펫티쉬Müfettiş(감찰관)로 활동할 당시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는 베르코프차Berkofça에서 직접 중재한 징세업자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요컨데, 조세징수도급은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악용된 것을 근거로 제도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 없기에, 이를 진리로 인정해선 안된다. 게다가, “비록 오스만의 조세징수도급이 행정의 부패 징후로 여겨졌으나, 이 비판은 후기에 발생한 권한 남용 때문으로 보인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조세징수도급의 긍정적인 면모들이 존재했고, 아리엘 살츠만Ariel Salzman에 따르면, “조세징수도급은 오스만체제가 18세기 최후의 십여년 간 계속된 경제적 위기를 견디게 중요한 도움을 준, 사회조직적 방식이었다.”

사실 오스만국가 초기로 시점을 돌려본다면, 조세징수도급은 나쁜 정책과는 거리가 먼, 국가에 많은 이득이 되는 존재였다. 14세기 초,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쇠위트 인근에 형성되기 시작한 소규모 터키 공국beylik으로 시작한 오스만국가의 영토는 엄청난 속도로 확장하여 14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서쪽으로는 세르비아와 왈라키아에서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의 말라트야와 시바스를 포함하고 있었다. 1454년에 오스만인들은 콘스탄디누폴리를 정복하여 세계에서 주요한 플레이어 국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국가가 확장함에 따라 그 관료제도 확장하였고, 현금의 필요성이 커졌다. 조세징수도급 체제는 국가가 세금 징수권─ 대개 3년짜리였다 ─을 경매로 판매하여 시장의 변동이나 자연재해, 영토상실로 인한 세입의 감소 등의 위험성을 징세업자에게 넘기고 상당한 수익을 올리게끔 해줬다. 예를 들어 오스만 지배자들은 광산 같이 고위험성 사업을 15세기 후반에 남들에게 맡겨버렸다.

국가는 조세징수도급 체제를 통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수익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상업을 증진시키는 여규할도 했다. 징세업자들은 현물을 현금화하기 위해 상업활동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또 세금 수취를 위해 복잡한 수취체계나 관청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조세징수도급은 이미 오스만조가 정복한 지역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던 바였다.

후기에 이르러 조세징수도급이 악용된 것은 중앙정부의 힘이 감소하여 국가가 징세업자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앙의 통제력 약화는 오스만국가 초기와는 거리가 멀다. 오스만국가는 빠르게 확장하였음에도, 나중과 같이 거대한 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메흐메드 2세(1451년 ~ 81년)은 징세업자들을 단단히 통제할 수 있었기에, 지불이 늦은 이들을 처형하여(Gökbilgin, 1952a: 135; 1952b: 152) 강력한 권위가 섰고, 체제의 악영향을 막을 수 있었다.

초기 오스만국가의 조세징수도급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처음에는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주 추적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세징수도급이 메흐메드 2세의 경제 정책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였음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1421년 ~ 1451년) 역시 조세징수도급을 활용했음은 분명하다. 오스만의 연대기 작가 아식파샤자데Âşıkpaşazâde가 15세기 후반에 적은 바에 따르면, 징세업자amaldar가 무라드 2세의 통치가 시작될 때, 즉 1421년 경에 겔리볼루에 설치되었다.

14세기의 증거들은 오스만인들이 최소 무라드 1세(1362년 ~ 1389년)의 재위기부터는 조세징수도급을 했음을 보여준다. 아식파샤자데에 따르면, 무라드 1세가 펜직pencik(포로 매 5명 당 1명을 술탄의 소유로 하는 것)과 노예 1명 당 25악체의 세금을 받는 제도를 세웠다. 무라드에게 이 세금을 못 걷으면 영지로 갚겠다고 다짐한 카라 뤼스템 파샤Kara Rüstem Paşa가 겔리볼루에서 이 일을 했는데, 그를 최초의 징세업자라 할만하다. 그러나 아식파샤자데의 기록과는 달리 무라드 1세의 재위기에 펜직이나 노예매매세를 매기는 관청이 최초로 설립되었으나, 징세도급제도는 아닌 것 같다. 이때에 기관이 설립되기는 했으나, 최초로 소개된 것은 아닌 듯 하다.

조세징수도급과 유사한 제도는 이미 다른 두 소규모 터키계 국가인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가의 발라트를 근거로 한 멘테셰 공국과 그 북쪽 테올로고스(지금의 셀축)에 근거한 아이든 공국에서 먼저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두 공국은 14세기와 15세기 초반에 베네치아와 조약을 맺었는데, 조약의 라틴어본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조약들 중 최초는 1331년의 것으로, 비누, 직물, 포도주 등 다양한 물품들을 아이든과 멘테셰에 수출하고, 아이든과 멘테셰에서는 왁스, 백반, 가죽을 수입하는, ‘appalto’ 또는 ‘gabella’ 계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카리아두 교수는 이 조약은 독점계약으로 파악하고, 이 물품들은 국가전매품이었던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당대 아나톨리아 서부의 터키계 국가들의 상황을 생각할때, 나는 독점보다는 세금수취청부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gabella란 말은 아랍어 카발라Kabala의 번역으로, 특정 세금을 맡긴다는 의미이다. 그리스어에서 gapela 또는 kampela로 옮겨졌으며, 독점을 의미하는 monopolion은 오스만어로 monabiliya라 옮겨졌다. 라틴어로 독점은 monopolium이라 새긴다. 베네치아와 멘테셰와 아이든이 맺은 조약은 그리스어로 쓰여진 뒤에 라틴어로 옮겨졌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모두 독점과 세금수취청부를 표현하는 용어를 가지고 있음으로, 사실 라틴어 gabella와 appalto는 본래 그리스어로 세금수취청부를 의미하는 gapela 또는 kampela를 번역한 것이다.

gabela란 단어는 멘테셰와 베네치아가 1407년에 맺은 조약에서는 amalim으로 대체되는데, 일반적으로 세금수취청부를 의미한 mukataa와 동의어인 amal의 라틴어식 번역으로 보인다. appalto의 의미를 세금수취청부로 새긴다면, 두 공국은 14세기 초부터 조세징수도급을 한 것이다.

따라서 조세징수도급은 14세기 동안 터키인들에게서 실시되었다. 최초로 소개된 시점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소개된 것이 아니라 영토의 정복에 따라 자연히 그 제도도 습득된 것일지 모른다. 조세징수도급은 무슬림 세계에서도 일반적인 제도였다. 압바스조나 셀주크조, 아나톨리아의 몽골인들도 이를 사용했다. 비잔틴 역시 제국에서 조세징수도급을 징세의 수단으로 오랜 기간 사용했다.(정확히는 로마공화국 시절부터 사용했다: 역주) 오스만인들은 셀주크, 몽골 또는 비잔틴을 통해 이 제도를 습득했으리라. 이에 대한 당대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단순한 추측 이상은 할 수 없다. 어쨋든 오스만, 멘테셰, 아이든공국은 아나톨리아 서부를 정복할 당시 이미 시행되고 있던 세제를 별다른 변경 없이 그대로 접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잔틴인들도 조세징수도급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셀주크시대와 몽골시대에 튀르크인들 역시 이 제도를 이용했기 때문에,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터키인들은 아랍어에서 조세징수도급을 의미하는 mukataa, amaldar, amil, mültezim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어 komerkion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gümrük을 사용했는데, 이슬람 세계에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어 굳이 새로운 용어가 필요없는데도 그리스어를 따온 것으로 보아 오스만국가의 조세징수도급 제도는 비잔틴적 기원을 가졌음을 보이는 듯 하다.

제도를 취하면서 그 관리들도 함께 흡수된 것 같은데, 아나톨리아 서부의 징세업자들은 대개 그리스인이었다. 14세기와 그 이후로도 터키 군주들은 그리스어를 외교 언어로 사용했다. 메흐메드 2세의 치하에서 그리스 징세업자들이 활동한 증거가 남아있다. 14세기의 경우 징세업자의 정체성을 파악할 근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오스만인들은 라틴계 징세업자를 이용하기도 했다. 메흐메드 2세 치하에서 활동한 라틴인들도 있었다. 무라드 2세의 아래에서는 제노아 상인 프란체스코 드라페리오가 백반 광산의 징세업자였다. 포카이아(아나톨리아 북서쪽 해안의, 지금의 포차)의 제노아 포데스타였던 죠반니 아도르노는 메흐메드 1세(1413년 ~ 1421년)에게서 백반 광산의 징세계약을 따냈었다.

무라드 1세(1362년 ~ 1389년)와 바예지드 1세(1389년 ~ 1402년)의 아래에서는 라틴인 징세업자들이 오스만 항구에서 활동했던 것 같다. 1390년에 바예지드 1세의 궁정에 파견된 베네치아 대사 프란체스코 퀴리니에게 베네치아 정부는 지령을 내린다. 이 문서에 따르면, 오스만인들에게 고용되어 항구를 관리하는 관리로 제노아 상인과 튀르크인이 있었는데, 제노아와 베네치아는 관계가 좋지 않음으로 베네치아 상인들은 튀르크인들과 일하기를 즐겼다. 베네치아 정부는 퀴리니에게 베네치아인들이 이 절차를 안 거치게끔 협상하되, 안될 것 같거든 최소 베네치아인을 관리로 고용하여 베네치아 상인들과 일하게끔 하라고 명했다. 베네치아 정부는 무라드 1세 아래에서 일했던 라틴인들을 바예지드 즉위 시점에 베네치아인들로 대체하게끔 노력했다. 이 문서에 명확히 서술되지는 않았으나, 이 관리들은 항구의 징세업자로 추정되며, 이익이 많이 남았고, 제노아 상인들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14세기부터 오스만국가 안에서 활동했음을 알려준다.

오스만국가가 하필 라틴계 상인들에게 징세권을 판 이유는, 이들 상인이 이 부분에 흥미와 징세권을 살 경제력 모두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 상인들 입장에서, 징세권을 구매하여 징세업자로 활동하여 해당 상품의 교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훨씬 나중에는 영국 상인들이 이와 똑같은 이유로 이즈미르의 징세권을 구매하여 경제권을 장악했었다. 라틴인들이 오스만 영토에서 아주 이른 시기부터 활동한 것은 제노아가 백반 교역을 장악하려 한 노력에서 잘 드러난다. 제노아 상인들은 1416년, 1437년, 1448년에 걸쳐 여러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오스만 백반 교역을 장악하고자 했다. 주요 합자회사는 1449년에 백반 500,000칸타르(약 226톤 가량)를 마련하는데, 오스만의 백반 시장 전체를 장악한 규모였음이 확실하다. 이 조합은 무라드 2세에게서 백반광산의 징세권을 따낸 프란체스코 드라페리오가 주도했는데, 그는 이익의 50%를, 나머지 상인들이 50%를 나눠 가졌다. 합자회사들은 상인들이 개인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끔 서로 합의했다. 모든 거래는 합자회사를 통해서만 이뤄져야 했고, 그 가운데 9명의 상인들이 뽑혀 회사의 협상과 거래를 담당하고 가격, 전세, 목적지를 정했다. 이들 9명은 투표를 통해(총 12표가 있었다) 방향을 결정했다. 여기서도 프란체스코 드라페리오의 대리인 크리스토포로가 4표를 지녔다. 백반 시장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레스보스의 군주에게 연간 5,000 키오스 두카트를 지불하여 미틸리니(레스보스의 수도)로 가는 백반을 차단했다.

즉, 라틴상인들은 징세권을 구매할 상업적인 이유가 차고 넘쳤다. 오스만국가 역시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음으로, 외국인을 청부업자로 고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세금의 부과는 국가의 지배력을 상징했기 때문에, 이는 국가 통제 체계에 대한 오스만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척도이다. 오스만국가가 외국인의 자복과 그 노하우를 활용한 것은 초기의 실용주의와 유연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일단의 생존을 보장해주었고, 나중에 부유하고 번성하는 제국으로 발전하는 거름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오스만인들은 멘테셰나 아이든의 공국과 마찬가지로 아주 초기인 14세기부터 조세징수도급을 활용했다. 오스만 군주들은 제노아인으로 대표되는 라틴 상인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자본과 노하우를 초기 오스만국가의 경제 발전에 이용했다. 이는 오스만 체제의 유연성과 초기 군주들의 실용성을 보여준다. 조세징수도급을 나쁜 제도로 보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이 제도의 채용은 초기 국가에 있어 복잡한 관료제의 채용이나 위험의 감수 없이 외부의 자본과 전문지식을 끌어들일 경제적 자극과 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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